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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세일해요" 고터 지하상가 상인들의 '슬픈 거짓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0일 오전 10시쯤의 서초구에 위차한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의 모습. 권민재 인턴기자

지난 10일 오전 10시쯤의 서초구에 위차한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의 모습. 권민재 인턴기자

지난 10일 서울 서초구의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 오전 10시가 되자 한 블록에서 마주 보고 늘어선 가게 20여곳 중에 장사를 시작한 곳은 3곳뿐이었다. 오전 영업이 한창일 시간이지만, 지하상가를 찾은 손님은 10여명. 오전 9시면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열었던 풍경은 사라졌다. 손님이 줄면서 영업 시작 시각도 늦춰졌다.

영업을 시작한 가게도 네 곳 중 한 곳에 ‘정리 세일’ ‘폐업정리’ 문구가 붙어 있었다. 찾는 손님도, 매장 입구 앞에서 손님을 맞던 호객도 없었다. 25년 동안 지하상가에서 옷가게를 운영한 60대 정모씨는 먼지 쌓인 옷걸이를 정리하면서 “월세를 내기도 버거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 일명 ‘고터상가’라고 불리는 이곳도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다. 고속버스터미널과 연결 지하철역 등으로 유동인구가 많다는 장점을 가진 이 상가는 중고생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에 고터상가는 2021년 기준으로 상점 총 212곳 중에 41곳이 폐업한 상황이다.

가게 곳곳엔 폭탄세일…“방학에 고터 찾는 학생들만 기다린다”

지난 10일 오전 10시쯤의 서초구에 위차한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의 모습. 권민재 인턴기자

지난 10일 오전 10시쯤의 서초구에 위차한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의 모습. 권민재 인턴기자

지하상가의 옷가게엔 철 지난 봄옷들이 ‘폭탄세일’이라는 문구로 팔리고 있었다. 폐업한 가게 사이에 ‘원가 이하 마지막 판매. D-1’이라는 표지판을 붙여둔 한 옷가게는 겨울옷부터 여름옷까지 사계절 옷이 모두 꺼내져 있었다. 10년 차 옷가게 주인 A씨는 “더는 임대료를 버텨낼 여력이 없다”며 “이렇게 여기저기 세일한다고 붙여놔도 어제 하루 매출이 겨우 3만원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11년에 강남역 지하상가가 리모델링 됐을 때 대출금을 쏟아부어서 온 자리인데 더는 버틸 수 없어서 나가려 한다”고 말했다.

30년 동안 지하상가에서 구둣가게를 운영한 B씨(59)씨도 마찬가지다. B씨는 “이 가게의 월세가 1000만원이고 여기에 인건비까지 줘야 하니 죽고 싶다”며 “7월부터 학교방학인데 재작년이었다면 학생들이 나들이와서 옷도 사고 구두도 사고 그랬을 텐데 지나가는 사람만 있을 뿐 아무도 없다”고 털어놨다.

고터상가를 도는 몇 안 되는 손님들도 ‘아이쇼핑’만 했다. 지하상가에서 쇼핑하고 있던 고등학생 김모(17)양은 “토플학원이 끝나고 잠시 들렀다”며 “코로나 때문에 물건을 만지긴 그렇고, 아이쇼핑용으로 본 뒤에 옷은 인터넷으로 구매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직장인 정모(26)씨는 “강남역 지하상가가 옷이 싸니까 대학생 때 예쁜 옷들 여기서 많이 샀었던 기억이 있다”며 “오늘은 친구 만난 겸 구경만 하는 중”이라고 했다.

떠나는 손님 붙잡으려…낚시용 정리 세일, 슬픈 거짓말

고터지하상가

고터지하상가

코로나19에 버티지 못한 가게들은 ‘낚시용’ 광고로 점포정리 간판을 걸어두기도 했다. 가게 입구의 쇼윈도에 ‘업종변경 정리세일’ 문구를 붙인 옷가게 직원 C씨는 “업종을 변경할 계획도 없지만, 코로나로 장사가 너무 안되자 생각해낸 궁여지책이다. 여전히 팔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억 단위로 빚진 상황이고 근처 가게들도 장사가 안되니 저녁 7시쯤 일찍 퇴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코로나19가 있기 전, 이 상가들은 퇴근시간대가 지난 뒤 오후 10시쯤에 문을 닫았다.

퇴근 때 몰리는 유동인구를 잡기 위한 고군분투도 역부족이었다. 11번 출구 인근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신모(45)씨는 “폭탄세일을 한다고 간판을 붙여놔도 들여다보질 않으니 크게 소리를 질러야 몇 명이 돌아본다”며 “퇴근할 때쯤이면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라리 “유동인구가 아예 없었으면 한다”는 상인도 있었다.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초창기엔 상가를 지나치는 유동인구가 사라지자 점포 주인들이 자영업자의 경영난을 위해 월세를 내려주는 혜택을 줬기 때문이다.

고터 지하상가는 지난해 5월 오프라인 상가와 연계된 온라인 쇼핑몰을 열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 중이다. 상가 관계자는 “지하상가 자체 몰로는 고객 유입에 한계가 있어 쿠팡이나 다른 오픈 마켓을 경유해 온라인 쇼핑몰을 확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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