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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서 '국제 첩보극'…'KGB식 러 간첩' 영국인 검거 발칵

중앙일보

입력

독일 베를린의 영국 대사관 전경. [AP=연합뉴스]

독일 베를린의 영국 대사관 전경. [AP=연합뉴스]

냉전시기 동·서 정보기관의 각축장이었던 독일 베를린이 최근 러시아 스파이 사건으로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다. 다름아닌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한 남성이 러시아 정보기관의 돈을 받고 스파이 활동을 한 것으로 드러나면서다. 영국과 독일 외교가는 발칵 뒤집어졌다.

대사관 근무하는 영국인 'S' 체포 #러 정보기관에 보안 정보 넘긴 혐의 #"하급 관리 포섭은 냉전 시대 수법"

1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ㆍ독일 도이체벨레(DW) 등에 따르면 독일 경찰은 전날 러시아 정보국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데이비드 S.’(57)라는 영국인을 체포했다. 독일 당국은 피의자가 베를린의 영국 대사관에서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 남성은 지난해 11월부터 러시아 정보국에 문서를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영국과 합동 수사를 벌이고 있는 독일 경찰은 베를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포츠담의 아파트에서 이 남성을 10일 체포했다. 자택과 직장도 즉각 압수수색했다. DW는 그의 체포 영장에 “최소 한 차례 업무 과정에서 얻은 문서를 러시아 정보기관 관계자에게 전달”했으며, “정보 전달의 대가로 불상의 현금을 받았다”는 내용이 기재됐다고 전했다.

이 남성이 러시아에 넘긴 자료는 현재까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테러 작전과 관련된 내용이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다만 이 남성이 현지 민간 계약자에 의해 고용됐으며, 영국 국적이지만 외교관 신분은 아니어서 대사관의 기밀 문서에는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베를린의 러시아 대사관 전경. 러시아 대사관은 이번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베를린의 러시아 대사관 전경. 러시아 대사관은 이번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러나 데이비드 클라크 전 영국 외무장관 특별보좌관은 가디언에 “그가 하급 직원이었다는 이유로 보안 문서에 접근 권한이 없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과거부터 동구권은 문서를 파쇄하는 사람, 일과가 끝난 뒤 쓰레기통을 비우는 청소부를 (스파이로)포섭했다”고 말했다.

이번 수사는 런던 메트로폴리탄 경찰 대테러부와 독일 연방 경찰청이 공조를 하고 있으며, 영국 군사정보국인 MI5 방첩부서도 조사에 참여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사건은 영국과 독일, 러시아 간 외교 갈등을 불러 일으킬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독일 외교부 크리스토퍼 버거 대변인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독일 영토에서 긴밀한 동맹에 대한 간첩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베를린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DW에 이번 체포와 관련한 논평을 거부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번 첩보 활동은 KGB(옛 소련의 정보기관) 시대 러시아 정부의 구식 플레이북”이라고 꼬집었다.

지난 2018년 영국 잉글랜드 솔즈베리 지역에서 러시아의 전직 이중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 율리아가 독성 물질 노비촉에 중독된 상태로 발견됐다. 이들 부녀는 중태에 빠졌지만, 이후 생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AP=연합뉴스]

지난 2018년 영국 잉글랜드 솔즈베리 지역에서 러시아의 전직 이중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 율리아가 독성 물질 노비촉에 중독된 상태로 발견됐다. 이들 부녀는 중태에 빠졌지만, 이후 생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AP=연합뉴스]

소련을 비롯한 과거 동구권 스파이들은 냉전 시기 서구권 국가 기관의 하급 직원을 포섭해 정보를 빼내는 수법을 종종 썼다. 동독의 비밀 경찰 슈타지(STASI)는 서독의 행정기관이 있었던 본에 투입해 일명 ‘로미오 작전’을 종종 펼쳤다. 대사관의 문고리 권력들인 여성 비서들을 연인으로 포섭해 중요한 문서와 서신을 훔쳐내도록 했던 것이다.

최근 러시아의 첩보 활동은 해커부대를 육성하는 쪽으로 진화하는 듯 했다.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크렘린 해커부대가 관여했던 민주당의 e메일 해킹 사건이 대표적이다. 가디언은 이번 사건으로 러시아가 여전히 하급 관리 포섭에 공을 들이는 올드 플레이북을 동시에 구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왜 베를린의 영국 대사관 직원을 타깃으로 삼았을까. 앞서 2018년 영국 솔즈베리의 한적한 공원에서 전직 러시아 정찰총국 대령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 율리아가 독성물질 노비촉에 노출돼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있었다. 자국 영토에서 대낮에 벌어진 살인 미수 사건에 영국 정부는 크게 반발했고, 150명 가량의 러시아 스파이를 적발해 쫓아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정보 기관 요원들의 입지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있는 독일 역시 자국 내에서 러시아의 정보 활동을 여러차례 적발한 전례가 있다. 올해 6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일 대학에서 자연과학ㆍ기술부서 연구조교로 근무하던 한 러시아 과학자가 러시아 정보요원을 세 차례 접촉, 돈을 받고 정보를 넘긴 혐의로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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