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장훈 칼럼

내향적인, 너무나도 내향적인 대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최고의 국경일인 광복절을 이틀 앞두고 드는 느낌은 숙연함과 착잡함이다. 수십 년 압제의 시대를 넘어 광복을 맞이했던 부모, 조부모 세대의 불굴의 의지는 여전히 존경스럽다. 하지만 광복을 전후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했던 강대국 정치의 구조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점을 돌아보면, 착잡하다. 강대국 정치의 주체가 미국-소련에서 미국-중국으로 바뀌었을 뿐, 그들의 힘겨루기와 그 파장을 관리해야 하는 우리의 운명은 그대로다.

이번 대선도 국내 이슈가 주도 #여야 선두권에 법률가 출신 다수 #후보 캠프의 불투명성도 한몫 #자유·평등·대외정책 선순환돼야

여전한 강대국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광복절을 맞으면서, 필자가 주목하는 현실은 요즘 우리 정치의 내향적 흐름이다. 여느 때와 같이 이번에도 대통령 예비선거전을 지배하는 것은 대내 이슈들이다. 경쟁 후보에 대한 저열한 네거티브 공세가 잠잠하다 싶으면, 뉴스라인을 도배하는 것은 장밋빛으로 채색된 부동산 정책, 일자리 정책, 복지정책들뿐이다. 후보들에게 북핵, 미중 신냉전, 사이버 안보, 한미연합훈련 등은 부차적인 관심사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10위권의 통상국가로 올라선 우리의 시선과 태도가 내향적으로 흐르건 말건, 냉혹한 국제정치는 우리 삶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76년 전 독립 운동가들과 평범한 한국인들은 독립을 위해 온 마음과 몸을 바쳤지만, 해방의 형식은 결국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권력정치의 입김에 좌우되었다. 2차 대전에서 40만 명의 전사자를 낸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 제국주의를 분쇄하는 최후의 싸움에서 소련 지도자 스탈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럽 전선에서 1천만 명의 전사자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희생을 치르며 히틀러를 제압하고 독일 파시즘의 심장 베를린에 먼저 도달하였던 스탈린 군대는 부리나케 방향을 바꾸어 일본 제국주의를 꺾는 대일 전쟁의 막바지에 급히 뛰어들었다. 이는 결국 우리의 해방이 남북으로 허리가 잘리는 해방으로 이어지는 통한의 결과로 이어졌다.

2022년 대선이 대외 이슈보다는 국내이슈에 몰두하는 내향형 선거로 흘러가는 데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작용하고 있다. 첫째, 여야 주요 후보들이 대부분 법률가 출신들이라는 배경. 둘째, 후보들의 정책캠프 안에서 벌어지는 ‘위대한 대통령 프로젝트 신드롬’.

첫째 이번 대통령 선거는 여야 구분 없이 법률가 출신 후보들이 압도하는 특이한 선거이다. 선두권 후보들 가운데 다른 길을 걸어온 이는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 이낙연 전 총리뿐이다. 여당의 이재명 지사, 야당의 윤석열, 홍준표, 최재형 후보는 모두 법률가로 출발하여 공직, 정치인 경험을 쌓아온 후보들이다. 이들 후보들이 부상한 데에는 저마다의 배경이 있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대외관계의 경험, 지식, 훈련을 쌓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법률가 출신들이 전쟁과 평화의 줄다리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국제정치의 속성을 체득하기는 쉽지 않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미·중 경쟁의 본질, 그에 대응하는 전략을 깊이 이해하고 준비하는 것은 법률가 출신들에게는 벅찬 과제이다. 결국 주요 후보들은 강대국들이 부딪치는 사나운 바다를 항해해 본 경험을 쌓지 못한 채, 5년간 한국호를 이끌고 거친 바다를 헤쳐 가는 선장이 되어야 하는 처지다.

둘째, 사정이 이렇다보니, 후보들의 정책 준비를 조력하는 이른바 정책캠프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각 후보들은 나름의 전문성을 갖춘 전직 외교관, 국제정치학 교수들을 부지런히 충원하고 있고 이들의 규모는 후보 캠프들마다 수십 명이 넘는다고 한다.

여기서 필자가 걱정하는 바는 각 후보 캠프에서 벌어지게 마련인 ‘위대한 대통령 프로젝트 신드롬’이다. 대통령 연구자들은 모든 대통령들이 자신이 역사에 너무 늦게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초조함에 시달린다고 주장해왔다. 한국 외교사에는 이미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의 큼직한 발자국들이 새겨져 있다. 결국 후보들은 역대 대통령들을 뛰어넘을 ‘통일 대통령’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킨 대통령’이라는 거대 비전에 마음이 끌리게 된다.

정책 캠프 안의 충성 경쟁, 무책임성이 더해지면서, 각 후보의 정책캠프들은 화려하지만 비현실적인 대외정책 공약들을 쏟아내게 된다. 가을쯤이면 우리는 ‘비핵개방 3000’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한반도 평화’보다 더 거창한 공약들을 듣게 될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국익을 지키기 위한 정책의 연속성, 현실적합성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물론 민주주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내향적인 체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유, 인권, 평등을 중시하지만, 이를 지키기 위한 대외적 싸움은 애써 외면하거나 소심해지는 것이 글로벌 민주주의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년 3월 선출되는 대통령은 글로벌 통상국가, 미·중 경쟁의 한복판에 선 한국을 이끌어가야만 한다. 후보들이 역사책 속에 족적을 남기고자 한다면, 화려하고 무책임한 공약을 만들기보다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한·미 FTA,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앞에서 고뇌하던 전임자들의 번민을 한번 더 돌아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