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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먹통 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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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P팀장

김현예 P팀장

‘꿀꺽한 내 5원을 돌려내라!’ 1969년 7월, 평범한 회사원 김 모 씨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사연은 이랬다.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 살던 그는 구청 앞 담뱃가게에 들렀다. 마침 급한 일로 전화를 걸었어야 했는데 가게에 놓인 공중전화가 문제였다. 5원을 동전 투입구에 넣고, 번호를 돌리려는데(옛 전화기 모를 독자를 위해 사족을 붙이자면, 당시 전화기는 구멍 난 전화기 번호판에 손가락을 넣어 돌려야 했다) 웬걸. 짤깍, 소리만 나고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통화 연결이 안 되면 동전이 도로 나와야 하는데 5원마저 날아간 것이었다. 김 씨는 담뱃가게 직원과 입씨름을 하다 열이 뻗쳤다. 전화국으로 쫓아갔다. 전화국의 대답은 ‘해당 전화기 이상 없음.’ 화난 김 씨는 변호사를 만났고 소장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희대의 ‘돈만 삼킨 공중전화 사건’은 이듬해 법원이 김 씨 손을 들어주며 끝이 났다.

미국에서도 안 터지는 전화 때문에 일파만파 소동이 일기도 했다. 1971년 3월 미국 방송국들은 일제히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미사일 공격’으로 인한 비상사태 선포 소식을 알렸다. 소동은 40분이나 지난 후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는데, 방위경보망 장치 시험을 하다 벌어진 일로 드러났다. 냉전상황 속, 나라와 나라 사이 불통이 불러온 해프닝이었지만 1년 뒤 미국은 백악관 지하실에 모스크바·베이징으로 바로 연결되는 전화(핫라인)를 놓고 매일 아침 6시에 통화를 했다.

전화 통화가 우리에게 많은 역사·정치적 함의를 갖게 된 건 1972년의 일이다. 전쟁으로 서로 총구를 겨눴던 남북이 직통전화 가설 합의서에 서명했다. 서울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사무실에, 평양엔 김영주 조직지도부장 사무실에 전화기를 놓기로 하고, 매일 아침 9~12시, 오후 4~8시에 열어두기로 정했다. 하지만 약속은 4년 뒤 일어난 북한 경비병의 도끼만행 사건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남북 간 전화는 북한 잠수정 강릉 침투사건, 천안함 피격 사건을 거치며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13개월간 끊어졌던 남북 간 통신선이 복원됐다가 지난 10일 또다시 불통 상태가 됐다. 통신 재개 2주 만의 일이다. 북한의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한미 연합훈련을 비난하면서 단절이 됐다. 자꾸 먹통 되는 남북 전화에 속 터지는 건 국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