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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NFT 작품, 펀드가 된 예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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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간송재단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대체불가능 토큰’(NFT)으로 바꾸어 판매한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NFT 예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부동산을 살 돈이 없는 이들이 가상화폐 투자로 몰리듯이, 고가의 작품을 살 돈이 없는 이들에게 NFT 예술은 매력적인 투자처로 떠오르고 있다.

육신을 버리고 영혼이 된 예술작품 #작품 아우라는 소유권에서 나온다 #NFT 작품은 금융자본주의의 산물 #바보를 현자로 만드는 더 큰 바보

똑같이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도 NFT와 가상화폐는 다르다. 가상화폐는 대체 가능하다. 내 돈 만 원이나 네 돈 만 원이나 차이가 없듯이 비트코인 한 개는 다른 한 개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NFT 작품은 대체 불가능하다. 그것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물(unikat). 모종의 원작이다.

물론 해례본의 물리적 원본이 존재하는 한 NFT 훈민정음은 그저 복제(copy)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외국에선 NFT의 유일성을 보장하려고 아예 원작을 불태우는 일까지 벌어졌다. 뱅크시의 판화 ‘바보들’(2006)은 그렇게 NFT라는 이름의 영혼이 되어, 무려 40여만 달러에 팔려나갔다. 국보로 지정된 해례본이 그런 운명을 맞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원본이 존재하는 한 NFT 해례본의 가치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기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비록 물리적 원본의 유일성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NFT로서 유일성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NFT 예술은 애초에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져 물리적 실체 없이 그 자체로 원본이 된다. 이 기술에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가장 큰 것은 아날로그 예술작품에 고질적으로 따라다니는 문제, 즉 위조의 시비에서 완벽하게 자유롭다는 것이다. NFT 예술은 진품성을 완벽히 보장한다. 나아가 NFT는 무명의 예술가들에게 전에는 없었던 기회를 제공해준다. 몇 푼의 돈만 내면 화랑을 거치지 않고도 작품을 NFT로 등록해 직접 대중에게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래 수수료가 드는 것도 아니고, 물리적 실체가 없기에 유통이나 보관에 따로 비용을 지불할 필요도 없다.

복제와 원작은 서로 배척한다. 원작은 유일성·지속성을 가지나, 복제는 반복성·일시성을 갖는다. 즉 ‘모나리자’의 복제는 수없이 많으나, 그것의 원작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그것뿐이다. 500년을 지속해 온 원작과 짧게 존재하다가 버려지는 복제는 물리적으로도 분명히 구별된다.

NFT 예술은 복제와 원작의 이 전통적 차이를 지운다. 가령 NFT의 구입자는 그것을 제 홈페이지에 올려놓을 수가 있다. 그가 허용만 한다면 홈페이지 방문자들이 그것을 ‘Ctrl C’할 수도 있다. 그렇게 얻어진 복제도 원작과 아무 혹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유일성을 갖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NFT 작품의 유일성이 ‘소유권’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원래 예술작품은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아이와 같은 존재. 아이를 칼로 잘라서 나눠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작품이 ‘소유권’으로 환원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온전한 작품을 팔아 대금을 나눠 가질 수는 있잖은가.

예술이 펀드가 된 셈인데, 사실 이 경향은 아날로그로 출발했다. 다미엔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는 백금을 씌운 해골을 8601개의 다이아몬드로 덮은 작품이다. 허스트는 이를 그 자신이 포함된 익명의 컨소시엄에 735억원에 팔고, 그 지분의 3분의1을 투신사에 팔아 제작비를 댔다.

그 작품은 어디에 있을까? 3분의1 지분만 가진 투신사에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투신사는 자신이 감상할 수도 없는 작품의 소유권의 일부만 가진 셈이다. 반면, NFT의 경우에는 작품을 공동으로 구입한 투자자들 각자가 온전한 작품을 가질 수 있다. 다만 소유권만 n분의1로 제한될 뿐이다.

원작은 유일물이기에 이른바 ‘아우라’(분위기)를 갖는다. NFT에서 유일한 것은 소유권. 오늘날 아우라는 작품의 물리적 현존이 아니라 그것의 소유권에서 나온다. 제조업에 기초한 산업자본주의는 오래전에 계좌에 기초한 금융자본주의로 변모했다. 이 상황이 예술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불태워진 뱅크시의 작품엔 크리스티 경매장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림 속 칠판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바보들, 저걸 정말로 사다니.’ 클릭 한 번으로 복제해 가질 수 있는 작품을 수억을 주고 사는 바보들. 이 바보짓의 토대는 그것을 더 비싼 값에 살 더 큰 바보들이 있다는 굳은 믿음이다.

NFT 작품은 가상화폐의 예술적 버전이다. 주식은 실물경제와 연동이 되어 있지만, 가상화폐는 그렇지 않다. 허스트의 작품은 물리적 오브제를 거래하는 예술시장과 연결되어 있으나 NFT 작품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그 위험한 바닥에 뛰어들어 폭탄 돌리기를 하는 바보들이 참 많다.

그들은 바보일까? 아니다. 허상이라는 가상화폐도 신입 바보들 덕에 여전히 유지되고 있잖은가. 태환화폐가 불환화폐로 바뀐다고 경제가 무너지던가? 새로운 예술시장에서 차익실현에 성공한 이들은 외려 기회를 보고도 놓친 나를 바보로 여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