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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백신 '공유지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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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 김부겸 국무총리,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 김부겸 국무총리,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중앙포토]

홍남기: 외교적 통로로 추가적 백신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정진석: 국민은 정부 얘기를 안 믿습니다.
홍남기: 믿으셔야 합니다.
정진석: 강요하지 마세요. ‘희망 고문’을 하지 마십시오.
홍남기: ‘희망 고문’이 아닙니다.

좋을 땐 서로 자기 공이라 하지만 #나쁠 땐 모두 잘못 떠넘기기 급급 #모호한 권한과 책임이 실패 초래

지난 4월 19일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이 국회에서 한 문답이다. 국무총리 대행이던 홍 부총리가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대사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를 연상케 하는 답을 했다. 워낙 확신에 찬 모습이어서 정부가 뭔가 해결책을 찾은 줄 알았다. 하지만 ‘희망 고문’이었음이 드러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11일 전인 4월 8일에는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이 취임 100일 기념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그는 “취임 후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백신 물량 추가 확보”라고 대답했다. 이어 “우리는 상반기보다 하반기에 확보된 물량이 훨씬 많기 때문에 수급 일정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권 장관은 ‘범정부 백신 도입 태스크포스(TF)’의 팀장이다. 외견상 그가 백신 확보 총책임자다. 그 하반기의 두 달째인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제(10일) 홍 부총리는 국무회의를 주재(김부겸 총리는 휴가 중)하며 “모더나사에 조속한 공급 방안 마련 촉구, 국제적인 백신 협력 등 외교적 노력을 통해 추석 전까지 3600만 명 접종(1차 기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달라”고 말했다. 4개월 전에는 자신의 말을 믿어도 된다고 국회에서 호언장담한 사람이 갑자기 똑바로 하라고 아랫사람에게 질책형 주문을 했다. 일이 잘될 조짐이 나타날 때는 자기가 다 한 것처럼 나서다가 막상 일이 틀어지면 누가 이렇게 해놨느냐며 성내는 게 꼰대 직장 상사 판박이다.

홍 부총리는 지난달 28일 맹탕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며 난데없이 ‘공유지(共有地)의 비극’을 얘기했다. 부동산이라는 공공재에 이기적인 사람들이 몰려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한다는 뜻이었다. 비유가 이상한 데다 정부의 실패 책임을 국민 이기심 탓으로 돌리는 것이어서 비난이 쏟아졌다.

진짜 ‘공유지의 비극’은 백신 정책에서 벌어지고 있다. 공유지는 모두가 주인인, 그래서 사실상 주인이 없는 땅이다. 풀이 풍성하면 다들 소와 양을 데려와 배를 채우게 한다. 뜯을 풀이 없을 때는 모두 외면한다. 유능한 관리 책임자가 없으면 삽시간에 황무지가 될 수밖에 없다.

백신 수급에 좋은 일이 있으면 총리·부총리·장관이 반색하며 국민 앞에 나섰다. 심지어 대통령도 백신 제조사 대표와의 화상통화를 뽐내며 한 숟가락 얹었다. 그러다 일이 어그러지면 서로 곁눈질하며 책임을 아래로 던진다. 상황이 좋을 때는 자기가 잘해서 그리된 것처럼 말하다가 형편이 나빠지면 멀뚱멀뚱 먼 산을 본다. 내팽개쳐진 공유지가 따로 없다.

우리가 백신 접종 더디다고 깔보던 일본이 2차 접종률 30% 선을 넘었다. 한국의 두 배 수준이다. 일본에는 백신 담당 장관이 있다. 그는 지난 5일 모더나가 공급에 펑크를 내자 곧바로 그만큼을 화이자에서 더 받는다고 발표했다. 일본의 백신 장관은 8선의 중의원 고노 다로(河野太郞)다. 외무상ㆍ국방상을 역임한 자민당의 핵심 정치인이다.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 1순위로 꼽히는 실권자다. 지난해 봄 이스라엘 총리는 국회의장이던 율리 에델스타인을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하며 백신 결정권을 위임했다. 영국 정부의 백신 태스크포스(TF) 의장은 의약 분야 전문가인 케이트 빙엄이라는 민간인이었다. 지난해 말까지 백신 계약을 총괄했다. 미국의 정부 문서에는 백신 책임자가 보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이라고 쓰여 있다. 어떤 백신을 얼마만큼 확보할지는 보건부가 정하고, 조달은 전략물자 구매 경험이 많은 국방부가 맡는다.

모호한 권한과 책임.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잘못됐다. 그리고 실패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