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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지령 혐의’ 청주 4명 미스터리…국정원 21년간 지켜만봤다

중앙일보

입력

2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충북 청주시 활동가 4명이 구속영장 심사를 받기 위해 법정에 출석하고 있다. 이 가운데 3명이 구속됐다. 연합뉴스

2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충북 청주시 활동가 4명이 구속영장 심사를 받기 위해 법정에 출석하고 있다. 이 가운데 3명이 구속됐다. 연합뉴스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원들의 지령을 받아 지하조직 ‘자주통일 충북동지회’를 결성해 활동한 혐의를 받는 충북 청주시 조직원 4명을 국가정보원이 21년 전부터 추적해온 사실이 확인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이들이 북한 공작원들과 해외에서 수차례 만나고 공작금까지 수령해 F-35A 스텔스기 도입 반대 운동 등을 벌이는 것을 ‘4년 내 지켜보기’만 하다가 5년 차에 이르러 공식 수사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국정원, 2000년 ‘새아침 노동청년회’ 때부터 4명 지켜봤다 

10일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국정원은 2000년쯤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당시 건설 노동자 박모(57·구속)씨를 내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사란 수사 직전 단계의 조사로 광의의 수사 활동이다.

박씨는 최근 국정원이 영장 신청서에서 지하조직 ‘자주통일 충북동지회(이하 충북동지회)’의 총책으로 지목한 인물이다. 그는 지난 2일 또 다른 박모(50)씨, 윤모(50)씨와 함께 구속됐다. 다른 공범인 손모(47)씨는 영장이 기각돼 불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고 있다.

국정원은 2000년 당시 박씨를 포함한 구속 피의자 3명 전원이 1998년 10월 결성된 충북지역 노동자·학생 연대조직인 ‘새아침 노동청년회’의 조직원으로 활동할 당시 내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단체의 총 조직원 수는 10명이었다.

박씨 등 3명은 2000년 9월 28일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연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이 청주 지역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고 이 아무개 교사에게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프락치란 특수한 사명을 띠고 어떤 조직체나 분야에 들어가서 본래의 신분을 속이고 몰래 활동하는 사람을 뜻하는 러시아어다.

당시 국정원은 “정상적인 내사 활동이었을 뿐 사건을 조작하거나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적은 없다”고 반박했고 결국 이 사건은 유야무야됐다.

‘서훈 특사’ 시절…중국·캄보디아서 北공작원 접선 현장 찍었다

그리고 21년 후 국정원은 지난 5월부터 경찰 국가수사본부와 공조를 통해 지하조직 ‘충북동지회’ 조직원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5월 27일 4명의 자택 압수수색에 동원된 수사 인력만 100명가량에 달했다.

국정원은 영장 신청서에서 “박씨 등 3명이 2001년 조직 이름을 ‘새세기 민주노동청년회’로 바꿨고 같은 해 당시 모 안경제조 업체 노조위원장인 손씨를 새 조직원으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또 압수한 북한의 지령문, 대북 보고문 내용에 따르면 “총책 박씨는 적어도 2004년, 손씨는 2010년경부터 북한의 대남공작조직인 문화교류국에 포섭되어 국내에서 암약하고 있다”라고도 했다.

이들이 2017년 5월 중국 베이징, 2018년 4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원들과 직접 만나는 회합 현장은 ‘촬영물’을 통해 실시간 들여다보듯 묘사했다. 이후 3년여 동안 여야 정치권 인사 등과 포섭 대상자를 접촉하고 스텔스 전투기 F-35A 도입 반대, 김정은 답방 운동 등 활동을 펼치도록 뒀다.

이를 두고 2018~2019년 남북화해 분위기와 여당의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 추진(2023년 말까지 유예) 등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2017~2020년 국정원장은 서훈 국가안보실장이었다.

사정당국에 정통한 인사는 “당시 평양과 워싱턴을 수시로 오가며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정부 특사로 활동했던 서훈 실장이 간첩 수사를 공개적으로 벌이긴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원은 결국 압수수색 두 달 만인 지난달 27일 조직원 전원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해 이달 2일 3명을 구속했다. 국정원은 9일 영장이 기각된 손씨를 추가로 소환 조사한 데 이어 구속영장을 재신청할지 검토 중이라고 한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손씨 “20여년 불법 사찰…모든 증거 조작하고 부풀려”

피의자들은 거꾸로 국정원의 장기 내사를 “불법 사찰”이라고 주장하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유일한 불구속 피의자인 손씨는 중앙일보에 “국정원이 20여년간 불법 사찰을 해온 결과가 이번 사건”이라며 “모든 증거는 조작됐거나 부풀려져 있다”고 말했다.

법조계에선 “국정원의 수사가 정치적인 외압에 의해 지연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공안수사, 간첩수사의 특성상 상당기간 내사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이 사건처럼 10~20년을 지켜본 건 유례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2017~2018년 중국과 캄보디아에서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조와 택시와 호텔 식당, 스타벅스 커피숍 등지에서 직접 회합한 사진 등 증거를 확보하고서 즉각 수사로 전환하지 않은 건 간첩 활동을 하도록 사실상 방치한 게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진행 중인 수사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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