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제재하니 코인·사이버범죄 굴팠다” 김정은 토끼로 본 美 후회

중앙일보

입력

지난 6월29일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주재 중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평양 노동신문=뉴스1

지난 6월29일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주재 중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평양 노동신문=뉴스1

“북한 김정은의 고립된 정권에 대한 ‘최대 압박’은 실패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9일(현지시간) 게재한 심층 분석 기사의 제목이다. 대북 제재를 통해 북한을 옥죄는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 기조가 실패했다는 게 기사의 요지다. 이 결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FT를 포함한 외신의 북한 관련 기사를 항상 100% 신뢰하지 않더라도, FT의 이번 기사는 눈여겨볼 만하다. FT가 심층 분석 기사를 싣는 ‘더 빅 리드(the Big Read)’ 코너에 게재됐다. FT가 소개한 미국 행정부 전직 대북 관료들의 발언도 참고할만하다.

FT가 최대 압박 정책 기조를 실패라고 규정지은 근거는 이렇게 요약된다. 대북 제재로 쿠웨이트 등 해외 북한 노동자 수가 급감하는 등, 북한이 기존의 방법으로 달러 조달에 실패한 것은 맞지만, 암호 화폐 및 사이버 범죄(cyber heist) 등의 대안을 찾았기에 북한 정권의 생존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 그 와중에 핵ㆍ미사일 능력은 고도화하는 데 성공해왔다고도 지적했다.

지난달 27일 평양. 6ㆍ25 정전협정 서명일이지만 북한은 승전일이라고 부른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27일 평양. 6ㆍ25 정전협정 서명일이지만 북한은 승전일이라고 부른다. AFP=연합뉴스

단, 정권과 주민은 별개다. 정권의 생명줄은 연장됐지만, 주민의 고통은 가중됐다. FT는 “평범한 북한 주민들의 생활은 지난 18개월 동안 더 고통스러워졌다”며 “그러나 지도자인 김정은과 그 왕족의 사치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은 타격을 피했다”고 지적했다.

FT는 미국 정부의 전직 대북 분석관인 레이철 리를 인용, “(북한 주민과 정권의) 괴리로 인해 북한에는 두 개의 다른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조 바이든 행정부의 책무라는 논리다. 레이철 리는 현재 북한 정보분석 전문 매체인 38노스 소속이다. 38노스는 한국 정부가 2018년 지원을 끊으면서 싱크탱크인 스팀슨센터 소속이 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제시한 그래픽. 각 연도별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 숫자다. 2011년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후 급증했다. [FT 캡처]

파이낸셜타임스(FT)가 제시한 그래픽. 각 연도별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 숫자다. 2011년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후 급증했다. [FT 캡처]

경제지인 만큼 FT는 통계와 숫자로 미국의 최대 압박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그중 하나가 김정은 정권에 들어서 북한 정권의 미사일 발사실험이 약 3배 이상 늘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물론 이는 핵 능력 고도화 및 핵탄두 탑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과정에 대한 분석이 결여된 단순 비교다.

그럼에도 북한이 이런 발사실험을 미국 및 국제사회의 제재 기조에도 불구하고 숫자를 늘려왔다는 것에 FT는 집중했다. FT는 익명의 한국 전직 대북 관료를 인용해 “(제재의) 당초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고 그 와중에 주민들의 삶은 더 어려워졌다”라고도 전했다.

국제사회 제재로 인해 북한의 해외 노동자 숫자는 줄어들었다. 사진은 2019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건설 현장의 북한 노동자들. 제대로된 안전 장치 없이 13층 높이에 자재를 나르고 있다. 전수진 기자

국제사회 제재로 인해 북한의 해외 노동자 숫자는 줄어들었다. 사진은 2019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건설 현장의 북한 노동자들. 제대로된 안전 장치 없이 13층 높이에 자재를 나르고 있다. 전수진 기자

그렇다고 제재 기조를 거둬들이는 것이 답일까. 아니다. 기존 제재의 구멍을 꿰매고 보수하는 작업이 답이다. 미국의 대북 제재 옹호론자이자 뚜렷한 보수 성향의 조슈아 스탠튼 변호사는 FT에 “처음 ‘최대 압박’이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실제로 북한의 돈세탁에 관여하는 은행에 9자리 숫자의 벌금을 매긴다면 믿겠다’고 생각했었다”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미국 정부가 대북 제재에) 그다지 진지하지 않았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제재라는 채찍은 물론, 북한에 비핵화를 조건으로 제시했던 여러 당근 역시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FT는 전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미 국무부 대북 담당으로 6자회담 특사를 지냈으며,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시드니 사일러는 FT에 “우리는 그간 북한에 수많은 당근과 채찍을 제시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전했다. 사일러가 덧붙인 말은 이랬다. “결론은 이거다. 김정은은 토끼가 아니라는 것.” 암호 화폐 및 해킹 등 사이버 범죄로 북한이 새로운 숨통을 튼 상황에선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읽힌다.

FT는 북핵 문제에 바이든 행정부가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북한의 핵무장은 이미 현실이 되어가는 시점에 정작 미국은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FT는 한ㆍ미 전·현직 관료를 인용, “핵무장한 북한은 더 이상 미국 외교 정책의 최전선에서 다뤄지고 있지 않다”며 “점점 고립되어 가는 북한은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