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염재호 칼럼

기업법인에서 기업시민으로

중앙일보

입력 2021.08.1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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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인류는 21세기에 문명사를 새로 써내려가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 e스포츠가 전통적 스포츠를 앞지르는 인기를 끌고, 가상공간인 메타버스에서 가상건물의 부동산 거래가 이루어지고, 블록체인 기반의 가상화폐 투자에 광적으로 뛰어든다. 가상인간 모델이 멋진 춤을 추는 광고에 팬덤 현상을 보이고, 대면의 만남보다 SNS 소통을 더 선호하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일기처럼 적어나가며 공개한다. 농경사회 정착민의 안정된 삶보다 떠돌며 사는 집시나 유목민의 삶을 동경하며 결혼과 자녀 양육 대신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를 즐긴다.

새로운 문명의 대두와 기업의 변화
사농공상 인식에서 기업시민으로
기업도 사회적 권리와 책임 느끼고
정부도 기업시민과 사회 혁신해야

정치·경제·교육·종교·문화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변화가 몰아닥치는 가운데 기업도 변하고 있다. 원래 기업의 주된 목적은 이익 창출이었지만 20세기에는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이 기업의 주요 지표가 되어 주주와 투자기관의 영향력이 커졌다. 21세기에는 주주들(stockholders)뿐 아니라 이해관계자들(stakeholders)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다. 투자자, 고객뿐 아니라 시민단체들도 기업을 감시하고, 투자기관들은 영업이익보다 ESG, 즉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기업가치의 핵심지표로 삼고 있다.

기업은 이익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소극적 사회공헌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적극적으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해야 기업의 이익도 따라오는 패러다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기업조직도 오너 중심이 아니라 주주, 이사회, 임직원, 고객 등 이해당사자 모두의 조직이 되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 임원과 노조의 대결 구도는 구시대적 유물이다.

사회 인식의 변화는 어떤가? 우리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으로 농업이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었다. 장인들의 공(工)이 농(農)의 뒤를 잇고, 상(商)은 농과 공의 생산 활동에 기생하여 부를 이루는 천한 것으로 여겼다. 경세제민의 사상으로 경제 시스템 운영은 선비인 사(士)에게 맡겨졌다. 먹고 사는 것이 최우선인 전통사회에서는 식량을 생산하는 농이 제일 중요했고 지식을 독점한 사가 국가운영을 맡는 사농공상의 신분 시스템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제는 국가 생산의 핵심이 3차 산업인 상(商)에 있다. 2020년 우리나라 1차 산업 경제비중은 1.92%, 제조업인 2차 산업은 35.82%, 상업이 중심인 3차 산업은 62.26%를 차지했다. 농가인구의 비중도 1955년 75.5%에서 2019년 4.3%로 하락했다. 202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수편람을 보면 세금 수입 중 법인세 비중은 우리나라가 15.7%로서 OECD 평균 10%보다 훨씬 높다. 우리나라와 OECD 평균 세수 비율은 소득세가 18.4% 대 23.5%, 재산세가 11.6% 대 5.6%, 부가세가 15.3% 대 20.4%로 나타난다. 우리나라는 OECD 평균보다 기업이나 재산가들의 세수 부담률이 훨씬 높다.

우리나라가 지난 50여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대기업을 비롯한 중소기업들의 글로벌 기업 활동 덕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의 매출 비중은 해외매출이 90%를 넘곤 한다. 대기업은 다양한 협력업체들의 국제경쟁력을 함께 높이며 나라 살림에 이바지한다. 이제 우리를 먹여 살리고 일자리의 대부분을 기업이 제공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국가의 핵심주체로서 기업을 대접해야 한다.

유럽에서는 18세기 들어 산업혁명의 여파로 부르주아 계급이 급성장했고 프랑스혁명 같은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시민혁명을 통해 세금 내고 복종하던 백성에서 천부적 인권을 주장하는 시민으로 인류의 문명은 바뀌었다. 이제 기업도 기업법인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기업 시민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오래전 중국에서는 이름만 있던 일반인들도 성을 갖게 하기 위해 백 개의 성을 나누어주고 세금을 걷었다. 백성(百姓)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생겨났다. 이와 마찬가지로 국가는 기업을 사람으로 여기도록 법인(法人)화한 다음 세금을 징수했다. 기업은 법인세를 국가에 납부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수동적 주체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제는 기업도 시민으로서 사회의 능동적 주체가 되어 권리를 주장함과 동시에 책임도 져야 한다. 기업 시민으로서 공익을 추구하는 시민단체나 재단도 만들고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글로벌 기업 활동을 통해 축적된 시스템 운영 능력을 사회적 가치창출을 위해 공헌해야 한다. 기업이 뒷짐 지고 세금만 내기에는 사회가 너무 복잡해졌고, 정치 행정의 능력은 상대적으로 점점 쇠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정부를 맡을 대선주자들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허한 구호만 외치지 말고 시대변화를 읽어서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살려내야 한다. 새 정부는 기업 시민과 함께 우리 사회의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늘려나가기 위한 혁신 작업을 도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월든』의 저자 소로우가 노예제도를 반대하며 세금 내기를 거부했던 시민 불복종의 목소리가 기업 시민들 사이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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