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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김승원의 커밍아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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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장혁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임장혁 정치부 차장·변호사

임장혁 정치부 차장·변호사

‘여야는 이날 오후 2시부터 쟁점을 두고 토론을 벌였지만 평행선만 달렸다. 회의 시작 7시간여 만에 박정 소위원장이 “위원회 대안으로 의결하겠다”며 표결에 부쳤지만, ‘위원회 대안’의 구체적 내용은 공유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야당 의원들은 “대안이 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의결하나. 이건 무효”라고 항의했지만 (중략) 회의 후 박정 위원장은 기자들에게 “의결하는 순간 대안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국회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일반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27일 밤 9시 30분 전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안소위의 언론중재법 개정안 의결의 효력에 관한 논란을 다룬 같은 달 29일자 본지 보도의 앞부분이다. 어떤 상황이 연상되는가. 다수 지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었다고 한다. ▶야당도 참석한 회의에서 장시간 격론 ▶이견이 좁혀지지 않은 채 여당 주도 의결 ▶야당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의결되는지 알 수 없었다고 주장 ▶국회 관계자도 통상적 ‘대안’ 의결과 달랐다고 지적.

노트북을 열며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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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눈은 남달랐다. 김 의원은 “구체적 내용이 대략적으로도 공유되지 않았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며 지난 3일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청구했다. 그가 이유로 든 ▶민주당안을 야당에 줬고 ▶야당도 토론에 참석했다는 내용은 기사에 다 있는데 왜 그는 사실이 아니라고 믿게 됐을까.

‘대안’의 의미를 이견을 실질적으로 절충해 만든 대체 법안이 아니라 ‘내가 떠든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대립 속에서 다수결에 부칠 때도 토론 끝엔 “어떤 정도를 의결하겠다”고 알리는 게 민주적 의결의 최소한임을 모르는 걸까.

청구 사실이 보도되며 김 의원은 “전두환 보도지침과 유사하다”는 찬사를 받는 개정안의 주목도를 더 높이는 덤을 얻었다. ‘대안’은 ‘허위·조작 보도’를 “허위의 사실 또는 사실로 오인하도록 조작한 정보를 보도하는 것”이라 정의하는 준엄한 동어반복으로 시작해 언론사 매출액에 비례한 손해배상 하한선 권고라는 참신한 발상으로 전개된다. 이어 손해액의 최대 5배 배상으로 절정을 찍고 지뢰밭처럼 짜인 고의·중과실 추정 요건으로 진한 잔상을 남기는 드라마틱한 구조다.

‘내 눈에 허위면 허위’라는 김승원식 청구와 새 각본이 결합할 때 생길 부작용의 극적 효과는 상상만으로도 소름 돋는다. 진실 추적의 고비에서 머뭇거릴 기자들과 정보 통제에 농락당할 국민들, 그리고 애먼 판사들의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오른다. 사회적 배경과 문맥 속에서 생성되는 의미의 그물망에서 ‘허위’를 발라내고 감정 섞인 ‘조작’이란 단어를  법적 냉정으로 변환하는 게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