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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근초고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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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여구야.” 10년 전 KBS 주말 대하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의 왕족들은 근초고왕을 이렇게 불렀다. 근초고왕의 이름이 여구(餘句)라고 기록된 것은 중국의 사서 『진서(晉書)』다. 그런데 ‘여구’라고 부른 것은 맞았을까.

백제 왕족의 성(姓)은 부여(扶餘)였다. 왕족뿐 아니라 백제의 많은 귀족은 지금과 달리 두 자(字)로 된 성을 가졌다.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부인이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택(沙宅)씨는 백제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또 『일본서기』에는 가야를 공격한 백제 장수 목라근자(木羅斤資)가 등장한다. 하지만 ‘사택’ ‘목라’ 같은 성씨는 중국과 교류하면서 점차 사(沙)·목(木)과 같은 한 글자 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중국 사서에서 왕족 부여씨는 여(餘)씨로 기록됐다. 그러니 여구로 기록된 근초고왕의 실제 이름은 부여구였을 것이다.

근초고왕

근초고왕

백제 멸망 후 부여씨 일족 상당수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기록으로도 입증된다. 지난해 동북아역사재단은 일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역주본을 펴내면서 한국계 가문은 기존에 알려진 163개가 아니라 313개이며, 이중 백제왕(百済王) 등 백제계 가문이 202개나 된다는 점을 새롭게 밝혔다. 『신찬성씨록』은 9세기 일본 정부가 주요 지배층 가문의 계보를 기록한 책이다. 2009년에는 백제 성왕의 아들 임성태자의 45대 후손인 오우치 기미오가 방한했는데, 1400년 만의 백제 왕손 귀국으로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