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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주한미군 철수 꺼낸 김여정…더는 끌려다녀선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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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과 미국은 예년보다 축소된 규모로 오는 16일부터 연합군사훈련을 시작한다.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 헬기들이 계류돼 있다. [뉴스1]

한국과 미국은 예년보다 축소된 규모로 오는 16일부터 연합군사훈련을 시작한다.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 헬기들이 계류돼 있다. [뉴스1]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한·미 연합훈련 실시를 거센 어조로 비난하는 담화를 냈다. 2주 전 복원된 남북 연락 채널도 어제 오후 다시 끊겼다. 한·미 연합 지휘소훈련에 대비한 사전 훈련이 어제 시작된 데 따른 것이다. 방어적 성격의 연례 훈련을 “전쟁 연습”이라 규정하고 “배신적 처사”로 몰아붙인 김여정의 담화는 대화 재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선제타격 능력 강화” 운운과 함께 “반드시 대가를 치를 자멸적 행동”이라며 향후 도발을 예고하고 나선 것은 새롭게 긴장을 조성하는 언동이다.

한·미 훈련 축소하자 북한은 더 큰 요구 #정부의 무원칙하고 비굴한 대응이 자초

더구나 김여정은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비난하고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 무력과 전쟁 장비를 철거하라”며 주한미군 철수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대북전단 문제로 재미를 본 김여정이 점점 압박 수위를 높이며 도를 넘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김여정의 압박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 지난해 대북전단금지법 통과 등 김여정의 ‘하명’대로 우리 정부가 움직인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여권 의원 74명이 연판장에 서명하며 연합훈련 연기를 공개 요구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자칫 북한에 오판의 소지를 줄 수 있는 행동들이다. 정부는 지금부터라도 양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을 명확하게 짓는 원칙의 확립이 필요하다.

이번 8월 한·미 훈련을 둘러싸고 빚은 극심한 혼란도 대화와 훈련을 구분 짓지 않아서 비롯된 일이다. 결과적으로 훈련은 성과가 의심스러운 수준으로 쪼그라들었지만, 우리 군과 정부에 돌아온 것은 북한의 비난뿐이다. 이 과정에서 여권 내부의 균열까지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북한의 요구에 손을 들어주거나 굴복하는 듯한 인상을 준 한국 정부 고위 당국자와 여권 정치인의 태도를 미국이 좋게 봤을 리 없다. 한·미 동맹의 신뢰관계에까지 손상을 입힌 것이다. 우리 정부가 거둔 성과는 아무것도 없이 손실만 자초했다는 얘기다.

이런 소동이 다시는 반복돼선 안 된다. 한·미 연합훈련은 북한 비핵화가 이뤄지고 안보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흔들림 없이 실시돼야 할 뿐만 아니라 훈련 성과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조정돼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가 없다는 것이 판명되면 언제라도 실기동훈련을 재가동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 표명도 필요하다.

남북 대화는 추진돼야 한다. 대북 제재의 범위에 들지 않는 인도적 지원의 재개도 필요하면 시행돼야 한다. 하지만 대화를 위해 안보 태세를 희생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북한의 부당한 압박에 대해서는 명확한 선 긋기와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 북한의 협박성 언사에 굴복하지 않는 정부와 안보 당국의 확고한 자세야말로 오판에 따른 도발을 예방하는 최선의 방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