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훈련 이해한다"던 김정은 본심 드러났다 "미군 철수하라"

중앙일보

입력 2021.08.10 15:24

업데이트 2021.08.10 15:36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10일 시작된 한ㆍ미 연합훈련을 비판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선대에는 최고지도자 차원에서 인정했던 주한미군 주둔을 김정은ㆍ김여정 남매가 이례적으로 문제 삼은 모양새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3년 전 북한이 한ㆍ미 연합훈련도 이해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주한미군 철수까지 노리는 북한의 속내와는 괴리가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청와대 사진기자단.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청와대 사진기자단.

김 부부장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조선반도에 평화가 깃들자면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 무력과 전쟁 장비들부터 철거해야 한다""미군이 남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한 조선반도 정세를 주기적으로 악화시키는 화근은 절대로 제거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일성ㆍ김정일 시대에 사실상 인정
김정은 들어서 '비핵화 조건'으로 제시
협상 국면서 넘어가다 돌연 '철수 요구'

앞서 김일성ㆍ김정일 시대에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을 공식적으로 용인하진 않았지만, 협상이나 대화 중에는 이를 이해한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1992년 1월 미국에서 열린 최초의 북ㆍ미 고위급 회담에서 김용순 당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는 아놀드 캔터 당시 미 국무부 차관에게 "북ㆍ미 수교를 해주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해당 제안은 사실상 거절당했다.

주한미군에 대한 북한 '최고존엄'의 입장은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었던 2000년 6월 15일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면담에서 확인됐다.

당시 김 위원장은 김 전 대통령에게 '김용순-캔터 회담'에서 북측이 북ㆍ미 수교를 조건으로 주한미군을 인정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그러면서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과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의 회고록 등을 통해 공개된 내용이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에 깊숙하게 관여했던 박지원 국정원장도 2019년 자신의 SNS와 앞선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한미군은 계속 한반도에 주둔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김정일이 "과거에는 주한미군이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의 군사적 조치를 막는 억지력의 일환이었지만, 냉전이 끝나자 오히려 주한미군이 동북아의 군사적 안정을 유지해주고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대북 협상에 오래 관여해온 고위 외교 소식통은 "당시 정상회담에 배석한 인사가 김정일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노동신문 등 북한 대내 매체에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느냐'고 묻자, 김정일이 '인민들은 아직은 거기까지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2000년 6월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0년 6월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남북 및 북ㆍ미 협상 전개 과정에 따라 북한이 충분히 주한미군 주둔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까지 알리거나 공식화하지는 않는 식으로 협상력을 지키겠다는 뜻이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 때인 2000년 10월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도 "당시 북한이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했으며 지역 안정을 유지하는 역할(stabilizing role)을 한다고 봤다"고 회고록을 통해 밝혔다.

하지만 김정은 집권 뒤 북한은 지난 2016년 7월 정부 대변인 명의 성명에서 '조선반도 비핵화'의 5대 조건에 '주한미군 철수 선포'를 포함했다. 이후 2018년 초부터 남·북·미 간 대화가 이뤄지는 동안에는 한동안 공개적으로 주한미군을 거론하지 않다 북한의 2인자인 김여정의 입을 통해 다시 꺼낸 것이다.
특히 선대에서 사실상 인정하고 김정은 시기 들어서도 암묵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던 주한미군 문제를 김씨 일가가 담화를 통해 직접 지적하면서 결국 북한의 본심은 주한미군 철수와 맞닿아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란 분석이 나온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2018년에 북ㆍ미 간 대화가 돌아갈 때는 주한미군 문제는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협상 장벽이 높아졌다"며 "향후 비핵화 협상이 재개되더라도 이제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를 주요 조건으로 내세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날 김여정의 담화로 '주한 미군→한ㆍ미 연합훈련 주도→북한에 심각한 군사적 위협→북한의 핵 보유 필요'으로 이어지는 김정은의 핵무장 정당화 논리가 보다 확연히 드러난 셈이다.

이를 두고 정부가 앞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신뢰한다고 밝히며 들었던 여러 근거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2018년 3월 당시 방북 특사단 대표였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현 외교부 장관)은 자신이 "연합훈련 때문에 남북관계가 단절돼선 안 된다"고 말하자, 김 위원장이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이해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또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고,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안전이 보장되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고 명백히 했다”며 “북측은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를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했다”고도 강조했다.

하지만 불과 3년 반만에 김정은이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본색'을 드러내면서 당시 정부가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느라 매몰돼 북한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결과적으로 국민을 향해 김정은의 거짓말을 대신 전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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