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영준의 시시각각

김여정도 놀랄 하명(下命)의 위력

중앙일보

입력 2021.08.10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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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한 ㆍ미 연합훈련이 논란 끝에 축소된 규모로 16일부터 실시될 전망이다. 사진은 과거 실시된 지휘소훈련 때 한ㆍ미 군 장병이 지하벙커에서 훈련 상황을 지켜보고는 장면. [사진 미 공군]

한 ㆍ미 연합훈련이 논란 끝에 축소된 규모로 16일부터 실시될 전망이다. 사진은 과거 실시된 지휘소훈련 때 한ㆍ미 군 장병이 지하벙커에서 훈련 상황을 지켜보고는 장면. [사진 미 공군]

훈련 없는 동맹을 악기 없는 오케스트라에 비유한 사람은 크리스토퍼 힐 전 미국 국무부 차관보였다. 그는 국내 언론 기고문에 “북한은 항상 그랬듯이 한ㆍ미 연합훈련에 반대할 게 분명하다. 중국과 러시아도 미국이 해빙을 역류시킨다고 비난하며 반대할 것이다”고 썼다. 김여정이 “희망이냐 절망이냐” 선택하라고 협박한 데 이어 중국 외교부장이 동조하고 나선 모양새가 딱 그대로다. 실은 힐이 이 기고문을 쓴 것은 2018년 2월이다. 그 후 한·미 동맹 오케스트라는 선율을 이끌어가는 주요 악기가 빠져 반쪽이 됐는데, 이번에 더 쪼그라들게 됐다.
 ‘항상 그랬듯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북한의 연합훈련 중단 요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올해 좀 더 유난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 이해 못 할 것은 북한의 훈련 중단 압박이 계속될 때마다 나온 우리 내부의 반응이다. 시간 순으로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올 1월 8차 노동당 당대회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직접 나서 ‘3년 전 봄날’을 언급하며 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했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첫해여서 3월로 예정된 전반기 연합훈련을 미국의 새 대북 정책의 시금석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그 직후 문재인 대통령은 “연합훈련을 북한과 협의할 수 있다”고 발언해 “훈련을 적에게 물어보고 하냐”는 논란을 일으켰다. 뒤이어 이인영 통일부 장관과 여당 의원 35명이 훈련 연기 내지 중단을 요구했다. 그런데도 3월 훈련이 실시되자 김여정은 “얼빠진 선택”을 했다며 막말을 퍼부었다.
 5월 한ㆍ미 정상회담 이후 문 대통령이 다시 연합훈련을 꺼냈다. “코로나로 대규모 훈련은 어렵지 않겠나”라며 “미국 측도 북ㆍ미 관계를 고려해 판단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그사이 남북 정상의 친서가 오가고 연락 채널 복구가 발표되자 김여정은 마치 청구서를 내밀듯 훈련 중단을 압박했다. 이런 홍역을 치른 끝에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8월 훈련이 실시되는 것이다. 지난 몇달 동안 일어난 일들을 복기해 보면 남과 북의 장단이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장단을 맞추는 이유가 문재인 정부 임기 내 남북 정상회담을 다시 성사시키기 위한 것이란 관측이 무성하게 퍼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국회의원 74명이 군사훈련을 하지 말자고 연판장에 서명한 것은 초유의 일이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연합훈련이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논리에 손을 들어주는 동시에 한ㆍ미 연합훈련이 방어용이란 정부 공식 입장을 여당 의원들이 연명으로 부인한 격이다.
 어찌 이들뿐이랴. 차기 국립외교원장으로 내정된 사람은 훈련 연기나 축소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훈련 무용론을 들고나왔다. 53대 1의 현저한 남북 간 국력 차를 감안하면 아예 훈련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좋은 공연장과 악기만 있으면 리허설 없이 연주회에 나가도 된다는 발상과 다를 게 없다. 더구나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와 달리 군이 출동해야 할 유사상황은 예고 없이 닥치는 법이다.
 이런 발상의 소유자를 청와대는 “외교 안보 전반에 폭넓은 이해와 전문성을 갖췄다”며 차관급 직책에 발탁했다. 졸업하면 바로 외교관이 될 사람들을 가르치고, 정부 의사결정과 정책 설계의 밑그림이 될 연구를 수행하는 책임자 자리를 맡긴 것이다. 그러니 김정은ㆍ김여정 남매가 어찌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여정 하명(下命)의 위력에 가장 놀라고 있는 사람은 김여정 본인일지 모른다. 지난해 6월 “법이라도 만들라”며 대북 전단 문제를 처음 꺼내들 때만 해도 그렇게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례가 점점 쌓이면 김여정 스스로 자기 확신의 함정에 빠져들게 된다. "내 말은 반드시 이뤄지게 된다"는 잘못된 믿음이 생겨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음번에 김여정이 또 무슨 청구서를 들이밀며 하명해 올지 두려움을 떨칠 수 없다.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전단금지법 이은 연합 훈련 축소
북한에 잘못된 확신 심어줄 수도
다음번엔 무슨 요구할까 걱정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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