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일만에 풀려나는 이재용…“훼손된 초격차 회복이 숙제”

중앙일보

입력 2021.08.09 19:12

업데이트 2021.08.10 08:0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장진영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장진영 기자

이재용(53) 삼성전자 부회장이 오는 13일 출소한다. 9일 법무부 가석방심의위원회에서 가석방이 결정되면서다. 지난 1월 18일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2년6개월을 선고받고 재수감된 지 207일 만이다.

9일 가석방심사위 의결…13일 출소 예정
2017년 시작된 ‘총수 부재’ 일정 부분 해소
미국 공장 등 ‘투자 시계’ 속도 빨라질 듯
재계선 “취업 제한 풀어야 한다” 목소리

이로써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는 지난 4년간 구속(2017년 2월)→석방(2018년 2월)→재구속(2021년 1월)으로 이어진 ‘총수 부재’라는 불확실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 부회장 앞에 놓인 숙제와 걸림돌은 가볍지 않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미국 반도체 투자 속도 낼 듯

9일 삼성전자와 경제계에 따르면, 이재용 부회장이 현업에 복귀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삼성의 ‘경영·투자 시계’가 빠르게 돌아갈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당면 현안인 미국 투자가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170억 달러(약 19조5000억원)를 들여 미국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텍사스주(오스틴‧테일러), 뉴욕주(제네시), 애리조나주(굿이어‧퀸크리크)가 ‘구애’를 하고 있지만, 삼성전자는 4개월째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 가석방의 근거 중 하나가 대규모 투자에 대한 신속한 의사결정인 만큼, 삼성이 이른 시일 내에 미국 투자를 결론 낼 듯하다”고 내다봤다.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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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년간 삼성전자 실적 정체·하락 

중장기적으론 지난 수년간 정체됐던 성장을 끌어올리고, 훼손된 시장‧기술 리더십을 회복해야 한다. 일부 논란이 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삼성전자는 실제 위기 상황”이라고 분석한다.

이 부회장이 처음 구속된 2017년 이후 삼성전자의 실적은 정체 상태다. 지난해 매출은 236조8000억원으로 2017년(239조600억원) 대비 1.2% 줄었고, 영업이익은 32%나 쪼그라들었다.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는 사이클이 있지만 반도체(DS) 부문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각각 4.7%, 47% 감소했다. 스마트폰을 담당하는 IT‧모바일(IM) 부문 역시 4년 새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6.6%, 3% 줄었다.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반도체 ‘세계 최초’ 타이틀 잇따라 내줘  

무엇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서 ‘세계 최초’ 타이틀을 잇달아 경쟁사에 빼앗겼다. 미국 마이크론은 삼성에 앞서 4세대(1a) D램 양산에 나섰고, 지난해 11월엔 업계 최초로 176단 낸드플래시를 공개했다. 2019년 말 128단 낸드플래시 첫 양산에 들어간 것도 삼성이 아닌 SK하이닉스였다. D램과 낸드플래시 점유율도 하락세다.

파운드리에서는 세계 1위인 대만 TSMC와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TSMC는 2024년 2나노 양산을 위해 지금 수십조원을 쏟아붓고 있다”며 “삼성이 더 늦게 시작하면 아예 따라가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글로벌 기업의 올해 실적 추정치와 시가총액을 비교. 유진투자증권의 자료를 재구성했다.

글로벌 기업의 올해 실적 추정치와 시가총액을 비교. 유진투자증권의 자료를 재구성했다.

중국 공세로 스마트폰 시장서도 고전  

스마트폰 시장에선 중국 업체들이 턱밑까지 따라 왔다. 시장조사업체인 카운터포인트리서치·카날리스 등에 따르면 올 2분기 삼성전자의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18~19%였다. 애플을 제치고 2위에 오른 샤오미와 격차는 2%포인트에 불과하다. 삼성이 점유율 1위를 차지한 국가는 최근 2년 새 57→41개국으로 급감했다.

갤럭시S 시리즈의 흥행 부진으로 프리미엄폰 시장에서 입지가 축소됐고, 카메라‧디스플레이‧배터리 기술도 사실상 중국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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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진 쇄신, 새 노사관 제시도 주목

이 부회장이 인적 쇄신에 나설지도 주목된다. 삼성전자는 2017년 7월 권오현 회장과 윤부근·신종균 부회장이 물러나고, 이후부터 김기남(DS)·김현석(소비자가전·CE)·고동진(IM) 대표이사 등 ‘3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세 사람의 임기 만료는 2024년이지만, 회사 내부에서도 “누군가는 정체된 실적과 흔들리는 리더십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창업 회장부터 고수해왔던 무노조 경영을 이 부회장이 폐기한 만큼 노조와 관계 정립에도 나서야 한다. 그는 지난해 5월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고, 노동 3권을 확실히 보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는 오는 12일 창사 후 처음으로 노조와 단체협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상반기엔 임금·성과급 지급 등에서 파열음이 나오기도 했다. 이 부회장이 어떤 노사관을 보여줄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지난해 1월 '삼성전자 준법실천 서약식'에서 김현석 삼성전자 사장(왼쪽부터), 김기남 부회장, 고동진 사장이 서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지난해 1월 '삼성전자 준법실천 서약식'에서 김현석 삼성전자 사장(왼쪽부터), 김기남 부회장, 고동진 사장이 서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이 부회장이 새로운 성장 모멘텀 만들어야”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신성장 전략 제시가 이 부회장의 가장 큰 숙제라고 입을 모았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전자는 특히 인공지능(AI)이나 사물인터넷(IoT) 등 신성장 동력 분야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며 “이 부회장은 내부에서 신사업을 개발하거나 대규모 인수합병(M&A)을 통해 성장에 기여할 굵직한 의사결정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역시 “잃어버린 초격차를 회복하는 게 (이 부회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며 “이를 통해 확실한 성장 모멘텀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5월 6일 오후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삼성그룹 노동조합연대 관계자들이 임단투 승리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월 6일 오후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삼성그룹 노동조합연대 관계자들이 임단투 승리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취업 제한으로 즉각 경영 복귀 어려워  

한편 이 부회장의 경영 보폭은 예전보다 좁아질 수밖에 없다. 당장 13일 풀려나더라도 등기임원 복귀가 어렵다. 해외 출장도 제약을 받는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5년간 취업 제한 규정에 묶여서다. 취업 제한을 풀려면 법무부 특정경제사범관리위원회를 거쳐 법무부 장관이 승인해야 한다.

다만 절차도, 심의도 까다롭다. 이 부회장 측이 취업을 승인해야 하는 ‘특별한 사정’을 소명‧증명해야 하고, 특정경제사범관리위는 이 부회장의 업무가 ‘대체 불가능한지, 아닌지’ 심의해 이를 통과해야 한다.

3년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얘기다. 이 부회장은 2018년 2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된 지 이틀 만에 ‘삼성 경영위원회’를 소집해 산적한 현안을 챙겼다. 이후 3개월간 인공지능(AI)‧전기차‧전장 사업 논의를 위해 유럽과 캐나다‧중국‧일본 등지로 출장을 다녀왔다. 당시엔 취업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에서 둘째)이 지난해 10월 반도체 장비업체인 네덜란드 ASML를 방문, 생산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에서 둘째)이 지난해 10월 반도체 장비업체인 네덜란드 ASML를 방문, 생산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일 하라고 풀어줬으면 일하게 해줘야”

한 재계 관계자는 “법무부가 밝힌대로 (이 부회장의 가석방에는)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경제위기 극복이 고려된 만큼, 이 부회장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취업 제한을 풀어주는 게 맞다”고 말했다.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은 “이 부회장이 사면이 아닌 가석방 방식으로 기업경영에 복귀하게 된 점은 아쉽다”며 “향후 해외 파트너와 미팅, 글로벌 생산 현장 방문 등 경영 활동 관련 규제를 유연하게 적용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삼성은 이날 이 부회장 가석방과 관련해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이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지난 4월 시작된 삼성물산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로직스 회계 부정 의혹 사건으로 다시 법정에 서야 한다. 프로포폴 투약 의혹 재판도 이달 중 첫 공판이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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