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뭐지, 이 현실감은”게임 친구의 ‘가상 언약식’ 가보니

중앙일보

입력 2021.08.09 11:00

[더,오래] 전명원의 일상의 발견(11)

청첩장을 받았다. 게임 친구에게서 온 언약식의 초대장이었다. 게임상에서 언약식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청첩장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웨딩마치를 울리며 행진도 하는 건가’, ‘설마 폐백도 하는 거야’, ‘웨딩 복장도 갖춰 입겠지’, ‘축의금을 준비해야 하는 건가’…. 듣기만 했지 직접 본 적은 없으니 상상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청첩장과 함께 드레스코드는 흰색으로 맞춰달라는 편지도 날아왔다. ‘뭐야, 이거 제대로인데’. 내가 시집가는 것도 아니고, 딸을 시집보내는 것도 아닌 데 서서히 신이 나기 시작했다.

게임 친구에게서 온 언약식 청첩장.

게임 친구에게서 온 언약식 청첩장.

게임이라면 어려서 잠깐씩 흥미를 가져보긴 했지만 나는 오히려 게임을 잘하지 못 하는 아이였다. 이제 고전 중에서도 고전이 되어 기억하는 이도 별로 없는 ‘피크맨’이라는 게임기를 동생이 가지고 있었다. 그 간단한 게임을 하면서도 자꾸 죽었다.

오락실에서의 게임은 비행, 전투 등 다양했다. ‘슈퍼마리오’ 같은 뛰어다니고 점프하는 게임은 유난히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테트리스’만 했을 뿐이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주로 테트리스로 밥값 내기를 했는데 늘 실력이 없어지는 쪽이었으므로 밥값은 내가 더 많이 냈다.

딸이 어렸을 때 한동안은 ‘크레이지아케이드’를 함께 열심히 했다. 둘이 앉아 한동안 몰두했다. 결국 업그레이드 버전의 ‘피크맨’이었으나 다양한 맵이 있으므로 재미있었다. 그 이후 가장 오래 했던 것은 '야채부락리’라는 게임이었다. 내 적성에 맞았다. 바쁠 것 없이, 하다가 끄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둘 수 있는 게임이었다. 다들 어이없어했다. 그게 왜 재미있는 거냐고 했다. “쓰레기 모아다 팔고, 폐가전제품을 부순다고?” 하면서 웃었다.

그 이후 핸드폰 게임이 다양하게 나왔다. 속도 빠른 캐릭터에 적응을 못 했으므로 농장을 일구고, 작물을 키우는 ‘에브리타운’류의 게임을 좋아했다. 다들 인사처럼 말했다. “세상에, 그 게임을 아직도 하고 있어?”

게임 속 식장 안에 들어가니 하객석에 다들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흥미진진한 현실감에 모니터를 보다가 혼자 웃음이 터졌다. 사진은 언약식 장면.

게임 속 식장 안에 들어가니 하객석에 다들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흥미진진한 현실감에 모니터를 보다가 혼자 웃음이 터졌다. 사진은 언약식 장면.

작년부터 온라인 PC게임의 세계에 빠졌다. 딸이 오래 했던 게임이었다. 가입을 도와주고, 게임 친구들을 소개해주었다. 학생, 직장인, 하는 일도 다양한 그들은 유쾌했다. 딸이 출근한 오후에 나 혼자 접속을 하면 그 친구들이 먼저 찾아왔다. 길 안내를 해주었고, 단축키를 사용하는 방법이며 게임 요령을 가르쳐주었다. 그 친구들을 따라다니며, 캐릭터를 꾸미는 방법도 익혔다. 접속할 때마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하며 먼저 인사해주고 반가워해 준 그들은, 게임을 하는 내가 신기한 듯했다.

언약식에 초대받은 이들이 식장 앞에 모였다. 게임상의 하객이지만 꽤 많아서 놀랐다. 시간이 되자 청첩장을 확인받고 언약식이 열리는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처음 들어가 본 언약식장이다. 다들 흰색으로 드레스 코드를 맞춰 입고 와글와글 떠들고 있었다. 채팅창이 빼곡했다. 게임상이지만 유쾌하기 그지없다. 대기실을 거쳐 본식이 열리는 식장 안에 들어가 다들 하객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모니터를 보다가 혼자 웃음이 터졌다. 뭐지, 이 흥미진진한 현실감은?

주례사도 있고, 예물 교환도 하고, 그렇게 축하와 박수를 받는다. 기념사진도 찍고 다들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샴페인을 터뜨리고 뛰어다녔다. 하늘에서 꽃가루가 날리며 유쾌한 이벤트가 끝났다. 게임상에서의 시간과 현실에서의 시간은 살짝 다르다. 게임상의 시간이 좀 더 빠른데, 현실 시간으로도 한 시간 가까이 걸린 것 같다. 제대로 언약식 한편이었다. 다들 덕담을 날리며 마무리한다. “백년해로하세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

오늘도 게임 세상은 이렇게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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