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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목숨 같은 北난수책 분실···태영호가 전한 '모가디슈' 진짜 결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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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남한 외교관들과 함께 소말리아 모가디슈를 탈출한 북한 외교관들은 어떻게 됐을까. 심하게 문책받진 않았을까.
주영 북한 공사 출신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 대사의 동반 탈출 사건과 관련, 그 시절 북한 외무성에 재직하며 파악했던 실제 내부 사정 등을 8일 중앙일보에 밝혔다. 최근 개봉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모가디슈’의 장면 뒤에 숨은, 그에게만 보이는 뒷이야기다.
1991년 실제 상황과 영화에 묘사된 장면, 태 의원의 설명을 함께 싣는다.

주영 북한 공사 출신의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우상조 기자

주영 북한 공사 출신의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우상조 기자

① 총격 속 사라진, 목숨보다 귀한 ‘난수책’

1991년 1월 10일, 남북 대사를 비롯한 공관원들은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를 빠져나가기 위해, 구조기 지원을 약속했던 소말리아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한다. 총성이 빗발치는 시내를 통과하다 차량을 운전하던 북한 공관원이 총을 맞는다. 그는 사력을 다해 대사관까지 차를 몬 뒤 숨을 거뒀고, 시신은 이국 땅에 묻혔다.

北 외무성 파악한 남북 동반 탈출 실화 #당시 사망한 북한 외교관은 무전수 #평양과 교신 암호 해독 난수책 사라져 #김정일 “살아돌아와 다행” 문책 안해

☞ 태영호 의원 “사실 당시 사망한 직원은 북한 대사관의 ‘무전수’였다. 북한은 1990년대 말까지 모든 대사관에 모스 부호 송신과 해독을 담당하는 전문 무전수를 뒀다. 소말리아에서 보낸 무전은 불가리아, 러시아를 거쳐 평양까지 오는 식으로 교신이 오갔다. 당시 공관원들이 외무성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무전수 사망 직후 슬픔을 가누지 못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평양과 교신하는 암호를 풀이하기 위한 서적, 즉 난수책이 든 가방이 사라져있었다고 한다.  

해외 공관과 본부 사이의 통신 암호는 목숨보다 귀중하다. 지금은 디지털 프로그램을 쓰지만, 당시엔 책이 있어야만 암호를 풀 수 있었다. 당시 주소말리아 대사였던 김용수 대사(극중 림용수역, 배우 허준호분)는 소말리아 탈출 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난수책 분실을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이실직고했다. 처벌을 면치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김정일은 “사람이 죽었는데 난수책이 대수냐. 살아돌아와 다행”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때 사라진 난수책의 행방은 영원한 비밀로 남을 듯 하다. 혼란스러운 이탈리아 대사관 안에서 피난민 혹은 타국 정보기관이 챙겼을 수 있다.”

1991년 1월 강신성 전 주소말리아대사가 중앙일보에 밝힌 소말리아 탈출기. '떼죽음 말자, 손잡은 남과 북', '내전 소말리아서 꽃핀 동포애'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중앙일보.

1991년 1월 강신성 전 주소말리아대사가 중앙일보에 밝힌 소말리아 탈출기. '떼죽음 말자, 손잡은 남과 북', '내전 소말리아서 꽃핀 동포애'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중앙일보.

② 모가디슈 곳곳서 날라오던 총알, 북한산?

당시는 내전의 기운이 감도는 소말리아를 무대를 남북이 유엔(UN) 가입을 놓고 외교전을 펼치던 시절. 소말리아 반군에게 무기를 판 게 북한이라는 의혹이 제기된다. 영화 ‘모가디슈’에선 한국이 관련 증거를 확보해 북측을 압박하고, 북측은 극구 부인한다.

☞ 태영호 의원 “북한의 소말리아 반군 지원설은 근거 없는 것으로 끝났다. 당시 소말리아 정부군이 반군의 무기고를 털었더니 북한산 AK-47(자동보총)이 나와 언론이 들썩였다. 하지만 소말리아 정부군이 1977년부터 2년 간 진행된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중에 버린 북한제 소총을 마을 주민들이 수거해 반군에게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북한이 내부적으로 파악한 바였다. 그럼에도 당시 소말리아 정부는 소말리아가 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하자, 북한이 이에 반발해 반군에게 무기를 넘겨준 게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영화 '모가디슈' 속 장면.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수도 모가디슈에서 함께 탈출을 다짐한 남북한 대사가 구조기를 타기 위해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하는 모습.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모가디슈' 속 장면.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수도 모가디슈에서 함께 탈출을 다짐한 남북한 대사가 구조기를 타기 위해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하는 모습.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③소말리아, 한국 대사관만 지켜준 이유는?

북한은 한국보다 먼저 소말리아와 외교관계를 수립했지만, 정작 내전이 발발하자 소말리아 정부로부터 대사관 보호를 위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다. 반면 한국 대사관은 소말리아 경찰이 경호를 섰고, 북측 공관원까지 이곳으로 피신했다.

☞ 태영호 의원 “북한은 한국보다 20년 앞선 1967년 소말리아와 수교했다. 김일성은 1970년대 초부터 소말리아를 ‘아프리카 자력갱생의 본보기’로 만들겠다며 상당한 경제ㆍ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북한식 제도를 받아들이게 해 발전을 꾀함으로써 북한 체제의 우수성을 보여주겠다는 의도였다. 북한의 혁명 이론에 의하면 타도 대상인 지주 계층을 도우면서까지 소말리아의 농업 발전을 도왔다.

하지만 소말리아는 빈곤과 끝없는 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날 북한이 소말리아에 지어준 성냥 공장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도와주는데 바레(당시 소말리아의 독재자) 그 놈이 무식하다"며 욕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 소말리아의 앙숙인 에티오피아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북한이 에티오피아와 밀착하면서 전보다 냉랭해진 태도에 소말리아는 불안해했다. 소말리아는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진 뒤 공산권에서 점점 소외됐고, 서구권으로 눈을 돌리던 중 한국과도 비로소 수교한다.

1990년 12월 반군에 의해 내전이 발발하자, 소말리아 정부는 자신들을 제대로 돕지 않는 북한 등 동구권을 원망한다. 결국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식으로, 갓 소말리아에 들어왔던 한국이 북한보다 더 수월하게 대사관 보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 '모가디슈' 속 장면. 남북 대사와 공관원이 서로를 경계하는 모습.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모가디슈' 속 장면. 남북 대사와 공관원이 서로를 경계하는 모습.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④ 모가디슈의 진짜 결말, 北 외교관 운명은?

1991년 1월 12일, 남북 대사와 공관원들은 천신만고 끝에 소말리아에서 케냐로 탈출한다. 생사를 넘나들며 손을 맞잡았지만 구조기에서 내리자마자 남남이 돼야 했다. 탈출기의 실제 주인공 강신성 전 주소말리아대사는 지난 2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평양에 갈 수만 있다면 그들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남북 동반 탈출기는 중앙일보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는데, 강 전 대사는 돌아간 북한 외교관들이 고초를 겪을까 걱정돼 언론에 “북한 사람들이 한국에 신세 진 부분만 부각되면 혹시라도 평양에서 곤욕을 치를 수 있으니 ‘남북 공동 탈출’로만 써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 태영호 의원 “김용수 전 주소말리아 북한 대사는 귀국 후 얼마 뒤 퇴직해 근황을 알 수 없다. 남한 외교관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탈출한 데 대해 특별한 문책은 받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김정일이 ”살아돌아와 다행“이라며 난수책 분실을 질책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영화에는 이탈리아어를 구사하는 북측 외교관 두 명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1990년대 후반 병으로 사망했다.
다른 한 명은 북한이 2000년 이탈리아와 수교한 뒤 초대 대사로 부임한 최택산으로 보인다. 최택산은 퇴직 후 연금 없이 힘들게 살고 있다는데, 영화 ‘모가디슈’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 통일부 북한정보포털에 따르면, 최택산은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하고, 소말리아 주재 서기관을 역임했다고 나와 있다.)
탈출 중 숨진 북한 무전수의 아내는 외교부 대외통신관리국 문서원으로 입부했다. 북한에선 외교관이 해외에서 사망하면 순직 처리하고, 배우자가 희망하면 순직자의 직장에 넣어준다. 무전수의 자녀는 혁명학원에 보내줬다.

⑤태영호의 모가디슈 ‘한줄평’은…

☞ 태영호 의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모가디슈에서 함께 탈출했던 남북 공관원들은 아마 30년 후에는 한반도가 통일됐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모가디슈의 기적은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믿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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