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힘, 플라스틱 햄 뚜껑 사라졌다…페트병 뚜껑은 부활

시민의 힘, 플라스틱 햄 뚜껑 사라졌다…페트병 뚜껑은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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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주부 정혜미씨가 집 근처를 '플로깅'하면서 수거한 쓰레기들. 담배꽁초부터 페트병, 캔까지 다양하다. [사진 정혜미씨]

주부 정혜미씨가 집 근처를 '플로깅'하면서 수거한 쓰레기들. 담배꽁초부터 페트병, 캔까지 다양하다. [사진 정혜미씨]

#플로깅

인스타그램에서 이 단어로 검색하면 4만2000개 넘는 게시물이 나온다(6일 기준). 플로깅(Plogging)은 산책이나 조깅을 하면서 쓰레기도 줍는 자발적 환경 보호 활동을 말한다. 운동복 입은 사람들이 봉투 가득 담은 플라스틱을 인증하는 사진이 속속 올라온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지구를 지키려 나서는 게 트렌드가 됐다.

[플라스틱 어스 2부] 1회 #시민들의 탈 플라스틱 상상은 현실이 된다

주부 정혜미(30)씨는 "코로나19로 플라스틱 쓰레기가 가득 쌓인 영상을 보고 플로깅에 나섰다. 동선을 달리해서 일주일에 서너번씩 나간다"고 했다. 그는 "내가 온라인에 남긴 활동들을 보고 주변에서 같이 하겠다며 인증샷 올리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플로깅, 빨대 반납…행동에 나선 시민들

플로깅처럼 '탈(脫) 플라스틱'에 팔 걷고 먼저 나서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쓰레기 수거, 재활용뿐 아니라 아예 버려지는 양 자체를 줄이기 위한 제안을 적극적으로 내놓는다. 똑똑한 소비자들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진다. 여러 명이 아이디어를 낸 뒤 이를 직접 행동에 옮기는 식이다. 아이디어는 선순환하면서 온·오프라인으로 점차 퍼져나간다.

자발적 시민 모임 '지구지킴이 쓰담쓰담'은 요구르트 이중 플라스틱 뚜껑을 기업에 반납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지구지킴이 쓰담쓰담' 인스타그램 @ssdamssdam_0 캡처]

자발적 시민 모임 '지구지킴이 쓰담쓰담'은 요구르트 이중 플라스틱 뚜껑을 기업에 반납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지구지킴이 쓰담쓰담' 인스타그램 @ssdamssdam_0 캡처]

자발적 시민 모임인 '지구지킴이 쓰담쓰담'(인스타그램 @ssdamssdam_0)이 대표적이다. 이 모임은 지난해 음료에 부착된 일회용 빨대를 시작으로 통조림 햄 플라스틱 뚜껑, 요구르트 이중 플라스틱 뚜껑 등을 연이어 기업에 반납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불필요한 플라스틱을 거부해 기업의 친환경적 변화를 끌어내겠다는 취지에서다.

꾸준한 노력은 유의미한 변화로 나타났다. 플라스틱 뚜껑 없는 통조림 햄 명절 선물세트가 출시됐고, 우유 회사들은 빨대 없는 우유 팩을 내놨다. 하나로 뭉친 소비자의 요구에 기업들이 응답한 것이다. 쓰담쓰담은 "누군가는 힘없는 개인이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자발적 시민 모임 '지구지킴이 쓰담쓰담'은 통조림 햄 플라스틱 뚜껑을 기업에 반납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렇게 모은 뚜껑을 모빌처럼 만든 모습. ['지구지킴이 쓰담쓰담' 인스타그램 @ssdamssdam_0 캡처]

자발적 시민 모임 '지구지킴이 쓰담쓰담'은 통조림 햄 플라스틱 뚜껑을 기업에 반납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렇게 모은 뚜껑을 모빌처럼 만든 모습. ['지구지킴이 쓰담쓰담' 인스타그램 @ssdamssdam_0 캡처]

허지현 대표는 "우리는 기업을 공격하기보단 기업·정부·소비자라는 여러 주체의 일원으로 공생하자는 식이다. 단 한 명이라도 자기가 원하는 기업과 품목에 의견을 내기 시작해 점차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게끔 한다"라고 말했다.

시민단체 탈 플라스틱 활동에도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필수다. 지난해 7월부터 서울환경운동연합이 진행 중인 소형 플라스틱 '업사이클' 캠페인은 약 1만명이 동참했다. 이렇게 모인 양이 3000kg, 플라스틱 병뚜껑 100만개를 모은 셈이다.

서울환경운동연합은 전국의 시민들이 열심히 보내준 걸 재가공해 튜브 짜개를 만들어 나눠준다. 재활용이 어려워 그냥 버려질 작은 플라스틱에 새 생명을 부여한 것이다. 김자연 활동가는 "올 4월까진 택배 형태로 플라스틱을 수거했는데 서울뿐 아니라 인천·경기 등 다른 지역 시민들도 많이 보내왔다"고 설명했다.

서울환경운동연합은 재활용이 어려운 페트병 뚜껑 등 작은 플라스틱을 시민들로부터 받아 '업사이클' 튜브 짜개를 만든다. [사진 서울환경운동연합]

서울환경운동연합은 재활용이 어려운 페트병 뚜껑 등 작은 플라스틱을 시민들로부터 받아 '업사이클' 튜브 짜개를 만든다. [사진 서울환경운동연합]

탈 플라스틱 제안 직접 보내준 독자도

신유진 광운대 교수가 탈플라스틱 아이디어로 제안한 모듈형 플라스틱으로 만든 의자와 테이블. 조립과 분해가 쉽다고 한다. [사진 신유진 교수]

신유진 광운대 교수가 탈플라스틱 아이디어로 제안한 모듈형 플라스틱으로 만든 의자와 테이블. 조립과 분해가 쉽다고 한다. [사진 신유진 교수]

지난달 중앙일보에 '플라스틱 어스 1부'가 나간 뒤, 탈 플라스틱 아이디어를 직접 제안한 시민들도 이러한 움직임의 연장선에 있다.

신유진 광운대 건축학과 교수는 e메일을 통해 자신이 개발 중인 모듈형 플라스틱을 제안했다. 접착제가 따로 없어도 블록 같은 플라스틱 조각을 조립하면 어떤 형태의 가구나 액세서리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이 모듈을 활용해 의자와 휴대전화 거치대, 비누 받침대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일회용 쓰레기가 되기 쉬운 플라스틱 특성을 거꾸로 활용하자는 취지다. 가볍고, 단단하고, 싸고, 복잡한 모양도 편하게 만들 수 있는 재료인 만큼 조립·분해만 반복할 수 있다면 반영구적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모듈은 일반 플라스틱으로 제작할 수 있는데 내구성이 좋다. 집에서 필요한 걸 금방 만들고, 필요 없으면 해체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면 된다"면서 "쉽게 사서 쓰고 버리는 플라스틱 소비문화를 바꾸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유진 광운대 교수가 탈플라스틱 아이디어로 제안한 모듈형 플라스틱. 다양한 모듈을 조립하면 접착제 없이 뭔가를 쉽게 만들고 분해할 수 있다고 한다. 불필요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사진 신유진 교수]

신유진 광운대 교수가 탈플라스틱 아이디어로 제안한 모듈형 플라스틱. 다양한 모듈을 조립하면 접착제 없이 뭔가를 쉽게 만들고 분해할 수 있다고 한다. 불필요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사진 신유진 교수]

정기선 전 아주대 경영대학원 교수도 나날이 심각해지는 플라스틱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일상 속에서 작은 것부터 바꿔나가는 걸 강조했다. 평소 카페 등에서 플라스틱 빨대를 주면 거절한다고 했다. 비닐 사용은 최소화하고, 공원에 가면 '플로깅' 하기도 한다.

최근 그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배달 용기다. 코로나19로 '집콕' 생활하면서 배달 주문이 늘고 일회용기 사용이 급증해서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탈 플라스틱 참여를 이끌려면 직·간접적 유인책이 있어야 한다고 봤다.

정 전 교수는 "업체와 논의를 거쳐 음식 배달에 많이 쓰는 플라스틱 용기를 표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용기에 움푹 팬 10개 칸을 일률적으로 만들어 각 가게 상황에 맞춰 쓰는 식이다"라면서 "표준화 용기를 만들면 생산업체로선 대량 생산에 따른 원가 절감 효과를 거둘 수 있고, 가게들은 용기 선택 부담이 덜해진다. 소비자도 깨끗이 씻어 반납한 뒤 보증금 몇백원이라도 돌려받는다면 호응도가 높을 것으로 본다"고 제언했다.

특별취재팀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70년. 플라스틱이 지구를 점령하기까지 걸린 시간입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플라스틱 사용이 급증하면서 플라스틱 쓰레기는 지구의 문제를 넘어 인류의 건강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에 중앙일보는 탄생-사용-투기-재활용 등 플라스틱의 일생을 추적하고, 탈(脫)플라스틱 사회를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플라스틱 어스(PLASTIC EARTH=US)' 캠페인 2부를 시작합니다.

특별취재팀=강찬수 환경전문기자, 정종훈·편광현·백희연 기자, 곽민재 인턴기자, 장민순 리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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