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지어달라 300억 기부…“자산가들의 ‘선물(Gift)’ 늘어나길”

중앙일보

입력 2021.08.08 17:00

업데이트 2021.08.08 17:40

‘한 인간을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읽은 책과 그가 쓴 글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독서는 지식과 지혜, 인간다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이 펼쳐진 지금 종이책은 물론 긴 글을 읽는 사람이 점점 줄고 있다. 심지어 게임과 영상, 웹툰 등 보는 것이 ‘더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다.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이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좋아하는 책들을 놓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 회장은 매년 새해나 명절 등에 직원들에게 추천 도서 목록을 만들어 돌릴 정도로 다독가다. 사진 MBK파트너스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이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좋아하는 책들을 놓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 회장은 매년 새해나 명절 등에 직원들에게 추천 도서 목록을 만들어 돌릴 정도로 다독가다. 사진 MBK파트너스

김병주(58) MBK파트너스 회장이 현금 300억원을 다름 아닌 도서관을 짓는 데 기부한 건 그래서 더 화제다. 그는 부자다. MBK파트너스는 자산 규모가 245억 달러(약 28조원)에 달하는 동북아시아 최대 사모펀드(PEF) 운용사다. 웬만한 인수·합병(M&A) 건에는 늘 이름이 거론되는 자본시장의 ‘큰손’이지만 김 회장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저는 자본가(Financier)이자 작가(Writer)면서 자선가(Philanthropist)입니다.” 
지난 6일 서울시청에서 도서관 건립 기부금 약정식을 가진 김 회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왜 하필 도서관인가.  
도서관을 짓는 건 오랜 꿈이었다. 어릴 때 가족이 미국에 이민을 갔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먼저 혼자 가게 됐다. 외롭고 말도 안 통하고…뉴저지 동네의 작은 도서관에 가서 매일 책을 봤다. 괴롭히는 사람 없이 자유롭게 통로에 주저앉아 중얼거리면서 책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어·문화·예술은 물론 연애도『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배웠다. 도서관이 세상이고 전부였다.

이번 기부금은 전액 서대문구 북가좌동 시립도서관 건립에 쓰이며 관련 조례에 따라 ‘서울시립 김병주도서관’으로 불린다. 김 회장은 “시험공부 하고 컴퓨터를 보는 게 아니라 정말 좋은 책을 읽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이름을 ‘독서관’으로 하고 싶었는데, 공무원들이 펄쩍 뛰면서 안 된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번 기부로 자수성가한 기업가와 자산가의 기부 문화가 확산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MBK파트너스 김병주 회장(오른쪽)이 지난 6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서울시립도서관 건립 기부금 전달식에서 오세훈 시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서울시

MBK파트너스 김병주 회장(오른쪽)이 지난 6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서울시립도서관 건립 기부금 전달식에서 오세훈 시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서울시

MBK가 아닌 개인 이름으로 기부한 이유가 있나.
한국의 기부는 전부 기업 위주다. 물론 그것도 좋지만 개인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선 대부분 개인이 기부하고, 기부를 ‘선물(Gift)’이라고 표현한다. 상대를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는 아주 산뜻하고 의미 있는 단어다. 금전적으로도 기업 기부는 세금이 공제되기 때문에 정부로선 세수가 줄어든다. 반면 개인이 하면 절세나 홍보 등 다른 목적이 없다.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예로 들었다. 박물관 운영비가 1년에 한화로 약 3500억원 정도 되는데 모두 개인 기부자가 내는 돈으로 충당한다는 것이다. 김 회장 본인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카네기 홀의 이사회 멤버로서 후원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최근 고(故)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 기증에 대해 “너무나 훌륭한 유산을 남기셨다고 생각한다. 살아계셨을 때 선물해 주셨더라면 더 아름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부 문화에 아쉬움을 나타냈다면 한국의 시장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한국 시장을 평가한다면. 
한국은 내수 시장이 크다. 중국·일본보다 규모 자체는 작지만 적응력과 순발력이 엄청나게 빠르다. 어떤 기술이 등장하고 소비자들의 원하는 것이면 무조건 성공한다. 예를 들어 쿠팡이 빠른 배송을 선보이고 소비자 호응을 얻으면 업계 전반이 여기에 재빨리 적응한다. 일본이 1980년대 IBM 같다면 한국은 21세기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다. 투자든 기업이든 창업이든 흐름만 잡으면 위기를 기회로 삼기 좋은 시장이다.  
자본시장에는 규제가 많지 않나.
세계적으로 사모펀드를 등록하게 하고 감독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런데 그 규제가 곧 지원이 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국내 사모펀드 운용사로 등록하면 세금 혜택이 있고 금융·통신 분야에도 해외 운용사와 달리 지분 제한 없이 투자할 수 있다.          

실제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경영 참여형 PEF 투자 규모는 18조1000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국내 사모펀드들이 인수·투자에 집행한 돈은 국내총생산(GDP)의 1.3%인데, 약 3%대인 미국이나 영국보단 낮지만 일본(0.6%)의 두배가 넘는다. 김 회장은 “한국 사모투자 시장이 얼마나 역동적인지, 얼마나 성장 의지가 강한지 보여주는 수치”라고 했다.

사모펀드를 기업사냥꾼이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사모투자가 아주 크고 중대한 산업은 아니다. 하지만 금융시장에서의 역할이 분명히 있고, 자본주의 시스템의 엑기스라고 할 수 있다. 잠재력 있는 기업을 인수해 시대에 맞는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하고, 스타트업에 투자해 회사를 키우고 일자리를 창출하기도 한다.  

MBK파트너스가 인수·투자한 국내외 기업은 약 40개. 이들의 매출을 더하면 약 54조원에 달한다. 최근엔 케이뱅크에 투자하고 롯데카드와 초콜릿 기업 고디바의 아시아 사업, 중국 최대 렌터카업체 ‘선저우주처(CAR Inc)’, 일본 아코디아골프장 등을 인수했다.

어떤 기업에 투자하나.
업종을 가리지 않고 점유율과 매출액을 보고 그 분야의 리더인지 따진다. 또 현금흐름이 탄탄하고 꾸준히 현금을 창출하는 회사를 고집한다. 무엇보다 MBK가 직접 회사를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훌륭한 경영진과 손잡는 게 정말 중요하다.
코로나19로 어려워질 기업이 많지 않을까.
코로나 사태는 큰 충격이고 그 여파가 지속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와는 분명 다르고 그 충격도 덜할 것으로 본다. 외환위기가 시스템 자체가 고장난 것이라면 코로나 위기는 어차피 있던 추세를 가시화·가속화한 것이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 건 아니다.
예를 들면.
쇼핑만 봐도 소비자들은 이미 온라인 구매로 가고 있었는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5~10년 걸릴 것을 1년으로 단축시킨 거다. 쿠팡처럼 제대로 흐름을 읽은 곳은 큰 수혜를 받고 과거 플랫폼에 머문 경쟁자들은 뒤따라가기 바빠졌다. 결국 산업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융합, 옴니채널이 정답이다. 이런 중요한 포인트들이 코로나 사태로 드러났다.
코로나 이후 한국기업들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핵심은 좋은 지배구조와 가치창출 능력이다. 세계적 수준의 기업으로 평가받고 투자를 유치하려면 최고의 상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그중에서도 지배구조가 글로벌 수준에 부합해야 한다.
노사·세대·젠더 등 사회 내부적인 갈등 요인도 많은데.
확실히 한국 사회는 정서적으로 극적이다. 하지만 그런 열정과 마니아적 특징 덕에 BTS 같은 K팝 스타들도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미국·홍콩·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살아봤지만 한국처럼 배려심이 있고 열심히 일하는 국민도 없다. 이게 강점이다. 외국엔 상부상조란 개념 자체가 없고, 성장보다는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이 출간한 자전적 영문 소설 『Offerings』. 이민 1.5세대인 주인공 '이대준'이 낯선 미국 땅과 월가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뤘다. 오퍼링스는 제사에 바치는 제물 정도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30대 부터 매일 일기를 쓰며 소설을 준비해 왔다고 한다.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이 출간한 자전적 영문 소설 『Offerings』. 이민 1.5세대인 주인공 '이대준'이 낯선 미국 땅과 월가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뤘다. 오퍼링스는 제사에 바치는 제물 정도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30대 부터 매일 일기를 쓰며 소설을 준비해 왔다고 한다.

‘김병주도서관’은 2025년 완공 목표다. 김 회장은 “파이낸스(금융)는 내가 하는 일이지만 내 전부는 아니다”라며 지난해 출간한 자전적 영문 소설『Offerings(제물)』속 한 문구를 인용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여기저기 기부하는 게 아니라 교육과 문화예술 분야에 집중적으로 ‘임팩트 기빙(Impact giving)’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7년 만든 MBK장학재단이나 이번 도서관 건립이 이에 속한다.

김병주 회장이 MBK장학재단 장학생들과 함께 한 모습. 김 이사장이 사재를 출연해 만든 MBK장학재단은 2007년부터 매년 10여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대학 등록금과 교재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사진 MBK장학재단

김병주 회장이 MBK장학재단 장학생들과 함께 한 모습. 김 이사장이 사재를 출연해 만든 MBK장학재단은 2007년부터 매년 10여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대학 등록금과 교재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사진 MBK장학재단

애독가로 유명하다. 어떤 책을 추천하나.
고전 소설을 반복해서 읽는 걸 권하고 싶다. 소설에 담긴 ‘은유의 힘’은 인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같은 것을 읽어도 사람마다 다른 경험을 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고전은 읽을 때마다 깨닫는 게 다르다. 최근 30년 만에 셰익스피어의『리어왕』을 다시 읽었는데 승계 문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비소설로는 스티븐 핑커 교수의『인라이튼먼트 나우(Enlightenment Now)』를 추천했다. 빌 게이츠가 “지금까지 읽은 모든 책 중에 최고의 책”이라고 평가한 책이다. 수많은 비극과 사건·사고, 양극화 문제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가 50년, 100년 전에 비해 훨씬 더 여유롭고, 행복하고, 현명하다는 긍정론이다.
김 회장은 “상대적인 부에 초점을 맞춘 양극화 문제가 화두지만 가난 자체를 없애는 게 중요하단 점은 흥미로운 시각”이라며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를 떠나 과거보다 책을 더 많이 읽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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