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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나타난 의문의 '종이박스'…남대문 지하도의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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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밤이 되면 서울 남대문 지하도는 노숙자 집단 숙소가 된다. 강주안 기자

밤이 되면 서울 남대문 지하도는 노숙자 집단 숙소가 된다. 강주안 기자

 지난달 27일 오후 9시 45분쯤 서울 남대문 지하보도 안으로 들어가자 노숙자들이 가득했다. 대부분 사람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누워있거나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연일 코로나19 확진자가 1000명 이상 이어지는 상황에서 위태로워 보인다. 인근 남산 지하도와 서울역 지하도에도 노숙자들이 모인다. 그런데 남대문 지하도의 노숙자들은 유독 종이상자와 이불에 심지어 텐트까지 많은 재료를 활용해 잠자리를 튼실하게 만들었다. 이 많은 짐을 어떻게 들고 다니는 것일까.

벽 안쪽에 커다란 공간 나타나 #종이상자ㆍ트렁크 가득 채워져 #“노숙자가 꺼내 잠자리 만들어” #‘다음 세대 전할 유ㆍ무형 유산’

다음날 낮 12시쯤 남대문 지하도를 다시 찾아가 봤다. 노숙자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들이 집처럼 꾸몄던 종이 상자를 비롯한 각종 재료도 흔적이 없다. 전부 어디로 간 것일까. 지하도 안에는 여성의류를 전시한 가게가 운영 중이다. 총 길이가 140m에 이른다는 지하도 곳곳을 다니며 찾아봤으나 의문을 풀지 못했다. 그때 벽 한쪽에 약간 튀어나온 검은 옷장 같은 물체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매직 테이프 같은 재질로 막아 둔 입구가 있다. 입구를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꽤 넓은 정체불명의 공간이 벽 안쪽으로 나타났다. 거기엔 놀랍게도 종이 상자와 트렁크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노숙자들의 짐들로 보였다. 낮에는 모두 사라졌다가 밤만 되면 지하도를 가득 채우는 남대문 지하도 노숙자들의 잠자리를 둘러싼 의문이 풀린 셈이다.

남대문 지하도 벽 안쪽에 있는 공간에 노숙자의 것으로 보이는 종이상자와 트렁크 등이 가득차 있다. 강주안 기자

남대문 지하도 벽 안쪽에 있는 공간에 노숙자의 것으로 보이는 종이상자와 트렁크 등이 가득차 있다. 강주안 기자

노숙인들이 남대문 지하도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노숙자를 오래 지원해온 한 전문가는 세 가지 포인트를 지적했다.
첫째, 일본강점기에 건설된 이 지하도가 천장이 낮고 전구가 많아 노숙자들이 아늑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겨울엔 전구 열기로 따뜻해 숙소로 인기가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둘째, 무료 급식소 등 지원 시설이 많은 서울역에서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 있어 다른 노숙자들로부터 간섭을 덜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각종 편의시설에 걸어서 가기가 힘들지 않아 나름의 독립생활을 누리면서도 식사나 목욕 등 해결이 쉽다는 점이다.
셋째로 지하도 위쪽에 선반 기능을 하는 구조물이 있어 물건을 두고 쓰기 편하다고 한다. 실제로 유심히 보니 천장 가까이에 선반 같은 구조물이 있고 거기에 장기판과 장기알 등 노숙인 물건으로 보이는 것들이 발견된다.

거기에 벽 안에 있는 특이한 공간에 ‘숙소용 자재’를 보관할 수 있어 노숙인들이 모여들기에 안성맞춤인 셈이다.
그러나 몰려든 홈리스로 인한 시민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지하도 입구 인근 가게의 주인은 ”지하도로는 가급적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대문 지하보도 안에서 옷 가게를 운영 중인 박선희 씨는 ”노숙자들이 지하도에 용변을 보고 담배를 피우는 등 너무 힘들게 한다“며 ”장사에 막대한 손해를 본다“고 말했다.
부친의 대를 이어서 가게를 운영 중이라는 박 씨는 벽에서 발견된 특이한 공간에 관해 묻자 ”거기에 엄청난 양의 짐을 보관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문제지만 벽을 들여다보면 불법적으로 철거한 흔적이 있어 오래된 지하도가 무너지는 건 아닌지 늘 불안하다“고 말한다.
또 "이 지하도에서 작은 불이 난 적도 있어 너무 불안하다"며 "서울시 등이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시가 운영 중인 관련 홈페이지에는 ‘2004년 정밀안전진단 후 2006년 구조보강 및 전면적인 리모델링을 실시하였다’고 안내돼있다.

서울 남대문 지하도에 있는 안내문.

서울 남대문 지하도에 있는 안내문.

이 지하도는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도다. 입구에는 이를 홍보하는 장식물이 꾸며져 있다. 서울시 관련 홈페이지에는 ‘남대문 지하보도는 일제강점기에 준공된 지하보도’라면서 건립 시기에 대해선 ‘1939년 보도에 예산 책정에 관한 기사가 실린 것으로 보아 1939~1945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서울미래유산’으로도 지정돼 있다.  서울시가 운영 중인 홈페이지에는 ‘서울미래유산은 한마디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것이지만, 다음 세대에게 찬란한 보물이 될 수 있는 유ㆍ무형의 자산을 뜻한다. 즉,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ㆍ현대 문화유산 중에서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 온 공통의 기억 등 미래 세대에 전해줄 100년 후의 보물인 셈이다’라고 적혀있다.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에 있는 남대문 지하도 설명.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에 있는 남대문 지하도 설명.

미래 세대에 전해줄 유ㆍ무형의 자산이 노숙자의 집합소로 이용되는 상황이다.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의 남대문 지하도 소개엔 1950년대 이후 신문 기사들이 실려있다. 이 지하도가 그때도 노숙인들이 모여들었다는 기사를 다수 소개하고 있다. 노숙의 역사가 70년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의 남대문 지하도 소개 화면. 1950년대의 남대문 지하도 노숙인 기사들을 보여준다.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의 남대문 지하도 소개 화면. 1950년대의 남대문 지하도 노숙인 기사들을 보여준다.

코로나19 사태는 지하도 상황에 우려를 보탠다. 백신 접종률이 낮은 길거리 노숙인들이 지하도에 모여 마스크 없이 생활하는 것은 노숙인들이나 행인들에게 모두 위험할 수 있다고 방역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노숙인 무료 진료를 돕는 임만택 라파엘 나눔 후원회장은 “진료를 받으러 온 노숙인들에게 물어보면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이 상당히 많다”고 말했다.
강주안 기자 joo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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