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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양주가 북미회담 조건? 김정은 ‘선물통치’ 뒤 숨은 비밀 [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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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24~27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제1차 조선인민군 지휘관·정치일꾼 강습회를 주재했다고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뉴스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24~27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제1차 조선인민군 지휘관·정치일꾼 강습회를 주재했다고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뉴스1

 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대북 사치품 반입

“북한의 식량은 1년 수요 548만t에 비해 100여만t이 부족한 상황이다. 재고량도 바닥이 났는데, 하계 곡물인 보리와 감자 등을 40만t 수확했다고 한다. 추수기까지는 이걸로 버티고 있다.”
“북ㆍ미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북한은 광물 수출ㆍ정제유 수입ㆍ생필품 수입 허용 등 제재 조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필품 중에서 꼭 풀어야 할 것에는 고급 양주와 양복이 포함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혼자 소비하는 게 아니라 평양 상류층 배급용이다.”

너무나 모순되는 두 내용은 모두 지난 3일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한 내용이다. 이를 종합하면 주민들은 식량 사정 악화로 보리와 감자를 먹으며 가을까지 버텨야 할 지경인데, 김 위원장이 미국과의 담판 조건으로 내건 것은 고급 양주와 양복이다.

 조선의 오늘

조선의 오늘

이례적으로 알곡 부족을 시인하고 직접 고난의 행군까지 언급하더니, ‘김정은식 고난의 행군’에서 꼭 필요한 것은 사치품이었나 보다.

사치품, 김정은 '선물통치' 기반 

이처럼 인민은 굶는데 국가 지도자는 고급 양주를 요구하는 비현실적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인민이 먹고사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거나, 사치품 수입을 통해 얻는 자신이 이익이 더 크기 때문이다.
둘 중 어느 쪽이어도 나쁜 지도자다. 김 위원장 본인이 그렇게 원하는 정상국가의 지도자상과도 거리가 멀다.

기본적으로 북한에서 사치품은 통치자금의 성격을 지닌다. 사치품을 나눠주며 측근들을 관리하고 충성심을 높인다.

20대 국회에서 외교통일위원장을 맡으며 북한의 사치품 관련 현황을 추적해온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김정은의 통치 기반 요소는 크게 세 가지인데 백두혈통이라는 점과 장성택 처형에서 드러나는 공포정치, 마지막 하나가 사치품을 기반으로 한 선물 통치”라고 설명했다.

당ㆍ군ㆍ정 핵심 요직에 있는 간부들에게 남성들의 시계나 여성들의 화장품, 양주, 카펫, 전자제품 등 사치품을 끊임없이 제공해 통치 실효성을 높이는 게 김정은의 중요한 통치기반 요소 중 하나다. 아버지인 김정일 때만 해도 사치품 수입 규모가 4억~5억 달러 수준이었는데, 김정은 시대 들어서 5억~6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충성심 유도용인데, 사치품 수입을 풀어달라고 하는 것은 통치 기반이 흔들린다는 징후로 볼 수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 지난 6월 29일 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중대사건'이 발생했다며 간부들을 질책했다. 뉴스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 지난 6월 29일 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중대사건'이 발생했다며 간부들을 질책했다. 뉴스1

실제 올해 들어 부쩍 잦아진 김 위원장의 간부 질책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는 시각도 있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국경 전면 봉쇄와 제재 등으로 경제난이 심각해지자 북한 지도층까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의 간부 질책도 이런 지도층의 일탈 조짐이 감지되는 데 따른 기강 잡기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사치품 매매로 남기는 수익도 김정은 몫 

게다가 사치품은 김 위원장의 ‘호주머니 사정’과도 직결된다. 주영국 북한 공사 출신의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이렇게 설명한다.

“북한에서 지난 10년 동안 장마당을 중심으로 시장경제가 돌아가면서 신분은 당 간부처럼 높지 않지만 부를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돈주)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평양에 있는 외화를 받는 이른바 ‘달러 상점’에 가서 사치품을 사는데, 달러 상점이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다 김정은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그런데 제재와 코로나19에 따른 국경 봉쇄 때문에 북한으로 사치품이 들어가지 못하니 돈주들은 돈이 있어도 쓰지 못하고, 김정은의 수입은 줄어들게 된 것이다.”

태 의원에 따르면 애초에 평양에 있는 달러 상점에 이처럼 고급 사치품들을 공급하는 힘 있는 회사들 자체가 모두 노동당 산하다. 해당 회사들이 사치품 무역을 통해 얻는 수익은 또 김 위원장에게 돌아가는 구조인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김정은식 고난의 행군’에는 사치품 반입이 왜 꼭 필요한지 이해가 간다.

물론 북한의 3대 요구 중 사치품이 갖는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작을 수 있다. 탈북민 출신의 학계 인사는 “세 가지 요구 중 북한이 사활을 거는 것은 광물 수출 허가로 봐야 한다”며 “이는 북한의 숨통을 트는 데 직결되는 수출품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321호.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321호.

실제 이는 동전의 양면 같은 이야기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수차례 대북 제재 결의를 통해 북한의 광물 수출 전체를 틀어막은 건 북한이 이를 통해 얻는 수익이 가장 크기 때문이었다.

안보리 "北, 주민 복지 대신 핵 추구" 

하지만 제재가 풀리고 광물 수출이 다시 허가돼 북한에 돈이 돌기 시작하면, 주민들이 수혜자가 될까. 안보리 생각은 다르다.

2016년 채택된 안보리 결의 2321호는 “북한이 그 주민의 필요가 심각하게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 주민들의 복지 대신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추구하는 것을 규탄한다(condemn)”고 했다.
북한 지도부가 돈이 생기면 주민을 위해 쓰는 게 아니라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쓰기 때문에 북한 주민은 더 굶주리고, 이 때문에 안보리가 북한의 광물 수출도 금지했다는 취지다.

북한 조선중앙TV가 지난해 10월 10일 오후 노동당 창건 75주년 경축 열병식을 방송하고 있다. 뉴시스

북한 조선중앙TV가 지난해 10월 10일 오후 노동당 창건 75주년 경축 열병식을 방송하고 있다. 뉴시스

김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인민을 향해 “미안하다” “고맙다”를 연발하며 울먹이기까지 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를 “국민의 감정을 어루만져주는 감성” “‘인간적인 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김준형 국립외교원장, 2020년 10월 12일 라디오 출연) 등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고급 양주와 양복을 요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평가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김 위원장이 당시 흘린 눈물이 진심이었다면, 우선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지원부터 받아들여야 했다. 인민에게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면 고급 양주부터 찾을 때는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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