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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 왜? ‘텔레이오이’에 담긴 예수의 본의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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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눈에 눈, 이에는 이.’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 왕이 선포했던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92~1750년)의 핵심이다. 법전에 기록된 내용은 더 구체적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면 자신의 눈알도 빼야 한다. 다른 사람의 뼈를 부러뜨리면 자신의 뼈도 부러뜨려야 한다. 부모를 구타한 자식은 손목을 자른다. 구멍을 통해 남의 집에 들어가 도둑질한 자는 그 구멍 앞에서 사형에 처한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는 자신에게 못질한 이들을 향해서도 "저들을 용서하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는 자신에게 못질한 이들을 향해서도 "저들을 용서하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근동(近東,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서아시아 일대)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바빌로니아 왕국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통용됐다. 바빌로니아가 멸망한 뒤에도 그랬다. 예수도 설교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복음 5장 38절)라고 언급했다. 당시 유대 사회에도 ‘동해(同害, 똑같은 해를 가함)의 복수법’으로 불리던 이 같은 정서가 강하게 녹아 있었다.

⑫원수를 사랑하라…왜 그래야 하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역사서를 보면 예수 당시 갈릴리 호수 주위에도 여러 성(城)들이 있었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이들은 경쟁 관계로, 때로는 칼과 창을 들고 서로 싸우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신체 일부를 잃기도 했다. 그러니 원수가 오죽 많았을까. 나의 부모를 죽인 이도 원수고, 형제를 죽인 이도 원수다. 남편이나 처자식을 죽인 이도 철천지원수다. 그런 원수를 향해 2000년 전의 유대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되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터이다.

예수는 달리 말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복음 5장 44절)

예수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유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그가 남긴 역사서에도 '예수'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중앙포토]

예수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유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그가 남긴 역사서에도 '예수'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중앙포토]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표정이 어땠을까. 황당해하지 않았을까. 복수를 해도 속이 풀릴까 말까 한데 말이다. 예수는 “원수를 잊어버려라”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했다.

예수의 출생 전부터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다. 높다란 바위 언덕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벽은 탄탄했다. 유대인들은 항전을 택했다. 폼페이우스는 안식일까지 기다렸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 물론 군사 행동도 하지 않는다. 폼페이우스는 그 점을 노렸다. 안식일에 그는 성을 공격할 공성 병기를 위해 높은 토담을 쌓았다. 이를 기반으로 예루살렘 성에서 가장 높은 성탑을 무너뜨렸다. 탑과 함께 성벽이 무너졌고, 벽이 갈라진 틈으로 로마 병사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예루살렘은 결국 함락됐다. 당시 2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유대인들에게 로마 제국은 원수였다. 자신들의 거룩한 종교 행위를 전쟁의 아킬레스건으로 활용했으니 로마에 대한 증오심이 오죽했을까. 전쟁에서 패한 뒤 유대인들은 로마에 많은 곡식을 바쳐야 했다. 생활은 갈수록 궁핍해졌다.

갈릴리 호수 주변의 산촌에 나 있는 길이다. 2000년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이런 길을 걸어다니며 산촌 마을에서 설교를 했다.

갈릴리 호수 주변의 산촌에 나 있는 길이다. 2000년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이런 길을 걸어다니며 산촌 마을에서 설교를 했다.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생산된 쌀이 일본으로 보내지고, 숱한 착취와 수탈이 이루어진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지금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 제국주의를 원수로 여긴다.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에 품었을 감정도 짐작할 수 있다.

갈릴리 언덕에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했다. 청중은 모두 각자의 원수를 떠올렸을 터이다. 누구에게는 로마의 군대이고, 누구에게는 자신의 이웃이고, 또 누구에게는 가족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원수들’을 향해 예수는 파격적인 행동을 제안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어찌 될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자녀가 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자녀란 뭘까.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이들이다. ‘신의 속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의 메시지에는 길이 담겨 있다.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길이 담겨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 길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만 하면 무조건 그 길을 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는 율법만 지키면서 그 길을 간다고 생각했던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착각과 뭐가 다른가. 예수는 그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로마에 대항해 유대의 독립을 주장하며 유대인들은 싸웠지만 결국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함락됐다.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 있던 숱한 유대인들이 학살 당했다.

로마에 대항해 유대의 독립을 주장하며 유대인들은 싸웠지만 결국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함락됐다.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 있던 숱한 유대인들이 학살 당했다.

그러니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길은 생각할수록 아득하다. 어쩌면 그건 역사 속의 위대한 성인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실제 원수를 그처럼 사랑한 사람도 있었다.

산돌 손양원(1902~1950) 목사는 1948년 좌익과 우익이 충돌한 여수ㆍ순천 사건 때 두 아들을 잃었다. 낮에는 군경이, 밤에는 좌익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두 아들이 좌익 학생에 의해 학살당했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리기 위해 직접 구명 운동에 나섰다. 급기야 그 원수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아들에게 못다 준 사랑을, 아들을 죽인 ‘아들’에게 건넸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손 목사는 몸소 따랐다.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에 우리는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받는다. 그러면서 되묻게 된다. “그건 성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지고 볶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 정말 가능한가.”

사람들은 부담을 느낀다. 목표치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메시지는 마치 만년설이 쌓인 수천 미터 높이의 거친 산봉우리에 꽂힌 깃발처럼 아득하다. 예수는 “그곳에 가서 깃발을 뽑아라”라고 하는데, 우리는 발도 떼지 못하는 형편이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들의 친구를 양자로 받아들인 손양원 목사. 아래는 손양원 목사(왼쪽에서 두번째)가 백범 김구 선생(왼쪽에서 세번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중앙포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들의 친구를 양자로 받아들인 손양원 목사. 아래는 손양원 목사(왼쪽에서 두번째)가 백범 김구 선생(왼쪽에서 세번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중앙포토]

왜 그럴까. 첫 단추를 끼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두 번째 단추만 안다. 정작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첫 단추는 알지 못한다. 왜 그럴까?

물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은 적도 없고, 거기에 답한 적도 없다. 성서를 관통하는 예수의 메시지에는 이치가 담겨 있다. 그 이치가 생략될 때 예수의 가르침은 그저 따라야 할 명령이 되고 만다. 그때는 복음도 짐이 된다. 유대인들의 어깨를 짓눌렀던 ‘율법의 짐’처럼 말이다.

예수는 왜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했을까.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성서에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다음 구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다.

“그분(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복음 5장 45절, 48절)

그렇다. 예수가 찍은 방점은 ‘완전함’이다. 하늘의 아버지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해라. 그것이 예수의 바람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했다. 이제 우리의 첫 단추가 보인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첫 단추가 아니라 ‘완전해지는 것’이 첫 단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그 아버지의 속성처럼 말이다.

그러면 예수가 말한 완전함이란 뭘까. “아버지의 완전함을 닮으라”라고 할 때 ‘완전함’이란 뭘까. 이에 대한 답도 예수의 어록에 이미 담겨 있다.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해가 떠오르게 하시는 하느님’이다. 예수는 이를 ‘완전함’이라 불렀다.

새벽녘에 갈릴리 호수에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다. 해가 올라오는 쪽의 언덕은 골란 고원이다.

새벽녘에 갈릴리 호수에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다. 해가 올라오는 쪽의 언덕은 골란 고원이다.

이제야 보인다. 예수가 굳이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한 이유 말이다. 우리는 ‘절반의 그릇’이다. 내가 생각하는 선(善)만 담고, 내가 생각하는 악(惡)은 쏟아버리는 그릇이다. 하느님은 다르다. ‘절반의 그릇’이 아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빛을 비추는 그릇이다. 그러니 ‘절반의 그릇’이 과연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했다. 그릇을 키우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그릇이 되라는 말이다.

그리스어 성서를 찾아봤다.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뭘까. 그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완전함’은 그리스어로 ‘텔레이오이(teleioi)’이다. 거기에는 ‘완전한(perfect)’의 의미도 있지만, ‘완숙한, 성숙한(mature)’의 뜻도 있다. 그러니 쪼개진 절반의 그릇이 아니라 통째로 하나인 그릇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성숙해진다.

우리 삶에서도 그렇고, 우리 사회에서도 그렇다. 가령 정치를 예로 들어보자.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 사람들은 이걸 양자택일의 문제로 여긴다. 그때부터 스스로 ‘반쪽 그릇’이 되고 만다. 나머지 절반에 대해서는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자세를 취한다.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한 데는 각별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느님 (하나님)마음을 닮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한 데는 각별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느님 (하나님)마음을 닮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앞에는 숱한 사회적 문제가 있다. 때로는 우파의 열쇠로 풀 수 있고, 때로는 좌파의 열쇠로 풀 수 있다. 그래서 양쪽 열쇠를 다 쓸 수 있어야 한다. 복지와 성장, 우리 사회는 둘 다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의 열쇠만 고집하고, 하나의 열쇠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자물쇠에 엉뚱한 열쇠를 억지로 끼우면서 부작용만 낳게 된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깊이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담긴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비로소 알게 되지 않을까. 원수라 여겼던 상대로 인해 내가 더 큰 그릇이 됨을 말이다. 좌파로 인해 우파가, 우파로 인해 좌파가 더 성숙해짐을 말이다. 여기에 예수가 설한 ‘텔레이오이(teleioi)’의 깊은 뜻이 있는 게 아닐까.

짧은 생각

어릴 적에 중국 무협 영화를 종종 봤습니다.
수십 편 보다 보니 대충의 줄거리를 알게 되더군요.
악당이 주로 주인공의 부모 혹은 스승을 죽입니다.
주인공은 혹독한 훈련 끝에 무술의 고수가 됩니다.
그리고 악당을 찾아가 원수를 갚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원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철천지 원수, 이런 말은 영화에나 등장하는 말로 생각합니다.
나라를 짓밟거나, 부모를 죽이거나,
역사 드라마나 무협 영화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한 ‘원수’는 그런 원수가 아닙니다.
우리의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 속에 있는 작은 원수를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어떻게 되나요.
내 안에서 먼저 미워하는 감정이 올라옵니다.
그 감정은 주로 독기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쏘아볼 때,
그 눈빛에 서려 있는 독기.
그런 독기가 내 안에서 먼저 올라옵니다.

그 다음에는 그 독기를 상대방에게 쏘아 댑니다.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런 화살을 쏘고, 또 쏘고, 또 쏘다 보면
이상하게도 내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화살은 분명히 원수를 향해 쏘았는데,
구멍은 자꾸 내 가슴에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독화살의 유통 과정에서
우리가 빠트린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가 내면에서 미워하는 감정을 끌어올릴 때,
그 독기에 젖는 1차 소비자는 다름 아닌 나 자신입니다.

원수를 향해 날아가기 전에,
독기는 가장 먼저 나 자신을 적시게 됩니다.

그래서 독기를 뿜을 때마다
내가 먼저 취합니다.
상대를 향해 날리기도 전에
나는 이미 독기에 젖게 됩니다.

그게 자꾸 반복되면 어찌 될까요.
그렇습니다.
내 가슴은 독화살로 빼곡하게 박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걸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온전해지라고 했습니다.
저는 독화살 이야기에서도
예수님 말씀에 담긴 이치를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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