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 중 현대 사상·문화에 큰 영향

중앙선데이

입력 2021.08.07 00:21

업데이트 2021.08.07 00:48

지면보기

748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8〉 

중국 체류 기간 옛 제자 후스(왼쪽 첫째)와 장멍린(오른쪽 첫째)의 안내로 이허위안(颐和园)을 유람 중인 듀이 부녀. [사진 김명호]

중국 체류 기간 옛 제자 후스(왼쪽 첫째)와 장멍린(오른쪽 첫째)의 안내로 이허위안(颐和园)을 유람 중인 듀이 부녀. [사진 김명호]

20세기 초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개혁을 입에 달고 다녔다. 말만 좋았지 뾰족한 대책은 없었다. 출로를 놓고 갈팡질팡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를 초청해 귀를 기울였다. 하고많은 서구의 지식인 중 듀이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컬럼비아대학 교수 시절 미국이 토해낸 경자년 배상금으로 유학 온 중국 청년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후스(胡適·호적)와 평민 교육가 타오싱즈(陶行知·도행지), 철학자 펑유란(馮友蘭·풍우란), 베이징대학 교장(총장)을 가장 오래 역임한 장멍린(蔣夢麟·장몽린), 난카이(南開)대학 교장 장바이링(張伯苓·장백령) 등이 듀이의 제자였다.

중국 지식인들 “강학 희망” 초청
듀이 “내 이상 실현하기 적합” 수락

2년3개월간 전국 돌며 지식 전파
청년 마오쩌둥, 경청하면서 기록

버트런드 러셀·타고르, 중서 ‘찬밥’ 신세

마작을 즐기는 뉴잉글랜드의 여인들. [사진 김명호]

마작을 즐기는 뉴잉글랜드의 여인들. [사진 김명호]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과 인도의 타고르도 중국에 머무르며 여기저기 강연을 다녔지만, 체류 기간과 영향력이 듀이에 비하면 어림도 없었다. 러셀의 강연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초청한 기관의 대표가 불평할 정도였다. “중국의 실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다.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몽상가다.” 전염병까지 걸리고 각계의 공격을 받은 러셀은 유감이라는 한마디 남기고 1년 만에 중국을 뒤로했다. 타고르는 러셀보다 더했다. 처음엔 인도의 성인(聖人)이 왔다며 잡지마다 특집을 발행했다. 시간이 지나자 베이징대학 문학원 원장 천두슈(陳獨秀·진독수)를 필두로 대표적인 지식인들의 비판이 줄을 이었다. 루쉰(魯迅·노신)은 타고르 이름만 나와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비난 전단도 난무했다. “인도에 가서 성인놀음이나 해라. 저 정도는 중국의 골목이나 산속에 널려있다.” 타고르는 상심했다. 일정 취소하고 중국을 떠났다.

듀이는 어릴 때부터 독서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호기심 하나만은 남달랐다. 퍼블릭 아이비리그의 알짜배기 버몬트대학 재학시절 모든 학과의 수업을 골고루 들었다. 1882년, 23세 때 쓴 논문이 당시 미국 유일의 철학 논문 학술지에 실려 주목을 받았다. 학위는 2년 후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받았다.

듀이는 현실을 무시하는 미국의 기계식 교육에 의문을 품었다. 시카고대학에 부속실험학교를 설립했다. 자신의 교육이념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다.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다 보니 독일에서 유입된 교사와 강의실, 교재 중심의 교육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험과 활동을 중요시하는 실용주의 교육을 주장했다.

1919년 초, 도쿄 제국대학이 듀이 부부를 초청했다. 목적은 강연이었다. 일본에 온 듀이는 학술단체의 초청에 쉴 틈이 없었다. 베이징대학 교수로 갓 부임한 후스가 꾀를 냈다. 도쿄에 체류 중이던 난징(南京)고등사범 교장과 베이징대학 동료 교수에게 전보를 보냈다. 두 사람은 귀국을 앞둔 듀이 부부를 방문했다. 장수(江蘇)성 교육회와 베이징대학 등 5개 학술단체 명의의 초청장을 전달했다. “신교육건설이 절실한 중국은 선생의 강학(講學)을 희망합니다.” 듀이는 기분이 좋았다. 즉석에서 수락했다. “영광이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다. 몇 차례 강연이라면 일정에 차질이 없다.”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의 부인들 사이에는 중국마작이 유행이었다. 마작을 즐기던 듀이의 부인도 입이 벌어졌다.

미국인들은 후스를 좋아했다. 1938년 주미대사로 부임한 후스. [사진 김명호]

미국인들은 후스를 좋아했다. 1938년 주미대사로 부임한 후스. [사진 김명호]

1919년 4월 30일, 듀이 부부의 상하이 도착은 거창했다. 후스와 타오싱즈, 장멍린 등 학계와 문화계의 거성들이 부두에서 스승을 맞이했다. 국부 쑨원(孫文·손문)도 듀이의 거처를 방문, 만찬 함께하며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쑨의 말은 무게가 있었다. “중국은 지이행난(知易行難), 알기는 쉬워도 행동에 옮기기는 힘들다는 공론(空論)을 만고의 진리처럼 숭상하는 전통이 있다. 경험이 부족하고 현실을 무시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나는 지난행이(知難行易), 깨우치기가 힘들지 행동은 쉽다고 생각한다.” 실용주의 철학자 듀이는 쑨의 탁견에 공감했다. 미국에 있는 딸에게 편지를 보냈다. “중국의 전 총통 쑨원과 만찬하며 많은 얘기 나눴다. 흔히들 혁명가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철학자였다. 장래가 우려된다.” 훗날 쑨원은 “내가 제창한 ‘지난행이’를 듀이도 인정했다”며 애들처럼 좋아했다.

항저우(杭州)에서 열린 듀이의 첫 번째 강연은 인산인해였다. 강연 도중 베이징에서 5·4운동이 발발했다. 민주와 과학을 외쳐대는 청년들의 열정에 듀이는 감동했다. 제자들에게 베이징행을 고집했다. 5월 30일, 학생운동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 듀이는 베이징에 도착했다. 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중국 학생들의 열정에 감염됐다. 나의 이상을 실현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어떤 부분은 미국보다 더 민주적이다. 힘 있는 사람들은 지들끼리 싸우느라 민생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평등이 저절로 완성된 기이하고 괴상한 나라다.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중국에 와서 직접 봐라. 인생은 체험이다.” 딸도 듀이 못지않게 호기심이 많았다. 중국 갈 채비를 서둘렀다.

듀이는 1919년 4월 30일부터 1921년 8월 2일까지, 기이하고 괴상한 나라에 2년3개월간 머물렀다. 후스를 비롯한 학계의 거목들을 통역으로 대동하고, 전국의 11개 성(省)과 대도시를 순회했다. 100차례 이상 실용주의를 소개하며 중서(中西)문화와 제도를 분석하고 비교했다.

저우언라이, 듀이 강연록 읽고 극찬

듀이의 강연은 교육계와 문화계뿐만 아니라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신문화운동의 사령관 격인 천두슈는 직접 강연회를 주관했다. 청년 마오쩌둥은 후난(湖南)성 창사의 강연에서 듀이의 말을 경청하며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 프랑스에 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친구가 보내준 듀이의 강연록을 읽었다. 실험주의야말로 세계 최고의 신사조(新思潮)라며 극찬했다. 비판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실용주의는 한마디로 실험주의다. 중국은 온갖 실험을 다 해본 나라다. 새로운 내용이 없다.”

듀이의 실용주의는 현대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듀이도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듀이의 중국강학 100년이 지났다. 아직도 중국이 듀이의 영향을 받았는지, 듀이가 중국의 영향을 더 받았는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사람들이 많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