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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금메달 같은 4등” 한층 성숙해진 올림픽 문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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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8호 30면

육상 국가대표 우상혁이 1일 오후 도쿄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남자 높이뛰기 결승전 경기에서 4위 2.35 한국신기록을 달성한 뒤 태극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뉴시스]

육상 국가대표 우상혁이 1일 오후 도쿄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남자 높이뛰기 결승전 경기에서 4위 2.35 한국신기록을 달성한 뒤 태극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뉴시스]

소설가 박완서가 1977년에 쓴 수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마라톤 경기를 구경한 화자(話者)는 꼴찌 주자의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결과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는 선수를 응원한다. 1등만 선망하는,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성적 지상주의에 대한 은유이자 무한경쟁 시대에 대한 풍자다.

코로나로 휘청댄 도쿄 올림픽 내일 폐막 #선수도, 팬들도 성적보다 스토리에 열광 #연금혜택·병역특례 등 제도 보완 나서야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가 꼴찌를 새롭게 보고 있다. 내일 17일간 장정에 마침표를 찍는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그간 낙오자 신세였던 꼴찌에게도 박수가 쏟아졌다. 처음 출전한 올림픽에서 참가 12개국 중 12위로 경기를 마친 남자 럭비대표팀이 대표적 경우다. “올림픽 정신 자체” 같은 격려가 온라인을 물들였다. 세계 강호를 상대로 불굴의 투지를 불태운 선수들에게 ‘아름다운 꼴찌’라는 칭찬이 잇따랐다. 국위선양 같은 명분 대신 스포츠 자체를 즐기는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특히 이번엔 ‘4등의 약진’이 도드라졌다. ‘노메달’에 그쳤지만 자신의 한계에 끝없이 도전하는 선수들이 빛났다. 예전 올림픽에선 보기 드문 풍경이다. 남자 높이뛰기에서 235㎝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4위에 오른 우상혁은 경기 후 “행복한 밤이다. 아쉽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팬들도 “내 마음속 금메달” “육상의 재미를 알게 됐다”는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남자 스프링보드 3m에서 역대 한국 다이빙 최고 성적을 기록한 우하람은 어떤가. “올림픽 4등 자체가 영광”이라고 했다. 포디움(시상대)에 서지 못한 실망과 분노는 없었다. 1등 콤플렉스, 메달 만능주의를 단박에 뒤집은 KO승·한판승과 같았다.

‘찬란한 4위’의 행진은 계속됐다. 체조 남자 마루운동의 류성현, 여자 역도 87㎏급의 이선미 등도 결과에 만족하며 다음 대회를 기약했다. 남자 자유형 200m에서 5위를 기록한 황선우가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 중 하나도 ‘만족’이었다. 4등은 쓸모없다며 아이를 들볶는 엄마와 체벌을 일삼는 코치를 비판한 영화 ‘4등’(2016)의 잔혹 동화와 거리가 멀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1년 늦게 열린 도쿄 올림픽은 일면 초라했다. 무엇보다 관중석이 텅 비었다. 선수와 팬이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가 실종됐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방송 중계권을 지닌 NBC의 계산 때문에 대회를 무리하게 강행했다는 비판도 거셌다. 그럼에도 메달 색깔보다 경기 자체를 만끽하고, 결과보다 과정을 주목하고, 승패보다 드라마에 열광하는 분위기는 우리가 이번 올림픽에서 거둔 값진 수확으로 평가된다. 예컨대 배타적 국가주의·민족주의에 기대고, 승리에 대한 희망고문을 뒤섞은 TV 중계가 더는 통하지 않았다. 객관적 실력과 팩트가 존중받았다.

스포츠는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 중 하나다. 이번 올림픽은 한국 사회의 서열화와 위계구조를 일정 부분 무너뜨렸다. 획일성에서 다양성으로, 강요·명령에서 자율·선택으로 나아가는 민주주의 원리와 부합한다. 오직 ‘실력’만으로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양궁팀의 공정·투명한 시스템은 국가·사회 운영의 기준이 되기에 충분하다.

도쿄 올림픽은 우리 스포츠계에 제도 개선이란 숙제도 남겼다. 순위·메달 강박증에서 벗어난 만큼 금·은·동메달을 딴 종목·선수에 편중된 연금·병역특례 등의 보완이 필요하다. 권위주의 시절 국위를 떨친 선수를 격려하는 목적에서 도입된 규정을 새 시대에 맞게 조정하는 작업에 착수할 시점이다. 올림픽·아시안게임 등 대회 난이도, 단체 종목과 개인 종목, 메달 색깔 대신 1~6위 순위 등에 따른 포인트 차등 지급·누적제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앞으로 6개월 남은 베이징 겨울올림픽에서도 이 논의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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