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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 교향곡에 심취한 고르바초프, 우아하고 친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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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8호 16면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23〉 방 벽화 속 인물들

조영남씨의 자택 안방의 사방 벽을 가득 채운 인물 사진 액자들. 일종의 인물 벽화다. [사진 조영남]

조영남씨의 자택 안방의 사방 벽을 가득 채운 인물 사진 액자들. 일종의 인물 벽화다. [사진 조영남]

지난주 나는 김동길 박사한테 내가 끝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저자 함석헌 선생을 소개해 달라 했고 내 청탁에 그러마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평생 후회한다는 소리를 썼다. 참 어이없게도, 어처구니없게도 그 후 나는 만나보고 싶은 대상이 없어졌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된 것인가. 내가 지금 일부러 드라마틱하게 꾸미는 게 아니다. 뒤돌아보니 그랬다. 내 나이 겨우 40대 후반 청년 시절이었는데 보고 싶은 사람,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옐친, 술 취해 횡설수설하고 춤까지 #부시 미 대통령 부인, 내 노래 좋아해 #이글레시아스, 종일 여자 얘기 가능 #잭 니클라우스와 골프 못해 아쉬워 #JP, 나를 ‘괴물’이라 부르며 챙겨줘 #DJ·YS 등 전 대통령과 다 인사 나눠

어쨌건 나는 40대 후반부터 정신적 열망이 흐려졌다고 고백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럼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 내 방 벽에 걸려 있는 사진 틀 속에 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다.

여기서 잠깐! 나는 자칭 영화광이다. 영화를 볼 때 어느 집 거실이나 침실 장면이 나올 때면 실내 장식을 어떻게 했나가 늘 나의 관심사다. 옛 왕조시대에는 어김없이 자기네들 초상화가 즐비하게 걸려 있고 상류층이건 서민층이건 나름대로의 장식들이 있다. 값 좀 나가는 그림을 걸어놓기도 하고 주로 가족사진들을 벽난로 위나 그랜드 피아노 위쪽에 주르륵 세워 놓기도 한다. 그게 기본장식이기도 하고.

내 경우는 내 딸 방만 빼고는 100% 나의 손길로 실내장식이 되어 있다. 큰 응접실엔 벽시계 이외에 걸려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내 작업 중인 미술작품이 실내장식인 셈이다) 내 침실 방에만 여러 모양의 사진틀과 내가 만든 미술작품이 촘촘하게 걸려 있다. 그중에는 내가 만난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정치인의 가족을 조롱하는(물론 그림의 당사자는 풍자라 했지만) 벽화가 최근 빅이슈로 떠올랐겠다, 아웅다웅 말고 조영남 벽화를 공개할 터이니 구경들 하시라고 제의를 해보겠다. 중앙SUNDAY 독자님들의 허락을 받았다 치고, 벽화를 낱낱이 공개하라는 청원도 받았다 치자.

고르비와 찍은 사진 가장 자랑스러워

조영남씨의 자택 안방의 사방 벽을 가득 채운 인물 사진 액자들. 일종의 인물 벽화다. [사진 조영남]

조영남씨의 자택 안방의 사방 벽을 가득 채운 인물 사진 액자들. 일종의 인물 벽화다. [사진 조영남]

내 방 왼쪽 벽에는 17점의 작은 콜라주 작품들이 걸려 있고 TV가 있는 앞면에는 26점의 사진 틀이 걸려 있다. 머리 쪽 벽에는 36점의 작은 작품과 사진들이 무질서하게 걸려 있고 내 머리맡에는 침대 사이즈에 맞춘 제법 큰(80호 정도) 태극기 그림이 20여 년 가까이 걸려 있다.

내 방에 걸려 있는 사진틀은 아무런 체계도 없이 아무렇게나 막 걸려 있다. 그중에 다수를 차지하는 내 사진과 내 식구의 사진을 빼고 나와 함께 찍혀 있는 인물들을 보고 “그럼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 중얼거렸던 거다.

먼저 해둬야 할 말이 있다. 이 사진들은 무슨 체계가 있거나 무슨 사연이 따로 있는 게 전혀 아니다. 어쩌다 사진틀을 구해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맞추어 끼워놓은 지나간 시간의 소산물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왜 그렇게 오랫동안 꼭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었을까 궁금해하면서 내 방에 걸려 있는 내 방의 벽화(사진들)를 이미 소개한 것들도 있지만 맥없이 보여 드리려는 참이다.

자! 그럼 내 방 전면 오른쪽부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면서 내가 군입대할 때 엄마 역할을 맡았던 이태영 여사님, 그 옆에 나와 함께 찍혀 있는 김민기, 민기는 내가 미술계에 들어가도록 등 떠민 사람이었음. TV 옆쪽에 있는 라틴계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이 친구는 내한공연 때 만났는데 솜사탕 같은 목소리로 엄청 인기 있었음. TV에서 이 사람과 2중창을 부른 적도 있음. 하루 온종일 여자 얘기를 할 수 있는 특이한 기술(?)의 소유자였음. 내 서랍 어딘가엔 88올림픽 때 한 무대에서 노래한 존 덴버나 나나 무스쿠리, 외국에서 만나 ‘카루소’라는 음역 높은 이태리 가곡을 함께 부른 루치오 달라 사진도 있는데 훌리오 사진만 벽에 걸게 됐음. 언젠가 미국 텍사스 공연 때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라는 노래의 주인공 BJ 토머스도 만나 친하게 됐는데 사진으로 남은 게 없어 매우 아쉬움. 사실은 BJ의 부인이 내 노래를 너무 좋아해 친하게 된 사이였음.

조영남씨의 자택 안방의 사방 벽을 가득 채운 인물 사진 액자들. 일종의 인물 벽화다. [사진 조영남]

조영남씨의 자택 안방의 사방 벽을 가득 채운 인물 사진 액자들. 일종의 인물 벽화다. [사진 조영남]

바로 아래로 정치가 김종필씨와 찍은 사진. 김종필씨는 나와 같은 충청도라 날 각별히 대해줬고 사람들 앞에서 저를 ‘괴물’이라 불러주었음. 일요화가회를 이끌었을 만큼 여유가 있는 어른으로 나는 가끔 “이런 분이 대통령 했어야 하는데” 하는 푸념이 나오곤 했음. 어디 찾아보면 김대중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을 텐데 왜 안 걸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음. 그런 식으로 만난 사람을 꼽아보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박근혜 다 만나 인사를 나눴는데 사진이 없음.

요기 좀 봐주시기 바람. 아주 귀중한 사진이 있음. 김수환 추기경과 김성수 대주교가 나의 양옆에 있는 사진임. 정통 가톨릭 대표와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온 영국 가톨릭 즉 성공회 대표와 함께 함께 찍은 사진. 언제 어떻게 만나 사진을 찍었느냐 물어도 소용없음. 이미 까맣게 잊었음. 아쉽게도 김장환 목사님이나 조용기 개신교 목사님 사진도 벽화에 없음. 그 아래 윤형주 이장희 송창식 김세환 조동진과 함께 있는 사진.

소련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와 자리를 함께한 조영남씨. [사진 조영남]

소련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와 자리를 함께한 조영남씨. [사진 조영남]

바로 그 옆 사진이 히트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골프 선수 잭 니클라우스와 역시 전설적인 골프 선수 베른하르트 랑거와 함께 찍은 사진임. 거기 내 친한 친구 스탠리 게일(게일인터내셔널의 회장)이 인천 송도 지구를 개발해 놓은 친구였으니까 그런 사진이 남아 있는 것임. 미친 척하고 그때 니클라우스한테 한 번 골프를 붙자고 했어야 하는 건데. 골프에 목매는 성격이 아니라 그냥 패스했던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음.

인천 송도 기념 파티 때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버지 부시 부부를 만났는데 부시 대통령 아주머니가 무척 인자하고 내 노래를 무척 좋아했음. 무슨 이유에선가 아들 부시가 한국에 왔을 때 찍은 사진도 벽에 걸려 있음. 물론 빌 클린턴 사진도 있고 빌의 남동생 로저 클린턴의 사진도 있지만 벽화에는 안 들어갔음. 세종문화회관에서 동생 로저의 색소폰 연주를 시연했는데 그날 내가 MC여서 빌과 로저를 혼돈할까 봐 무척 신경을 썼던 기억이 생생함. 동생의 색소폰 연주는 그저 그랬음.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도 한국에 왔었는데 지나간 얘기니까 괜찮을 거라고 믿고 털어놓는 건데 환영음악회를 시작하기 전에 옐친은 이미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고 노래를 할 때마다 앞으로 나와 덩실덩실 춤도 추고 가수들과 악수를 나누고 수선을 떨고 그랬음. 주책 없어 보였지만 매우 유쾌한 사람이었음. 옐친에 비해 내가 이미 미술작품으로 남겨 놓은 고르바초프 부부는 정말 달랐음. 너무 친절하고 우아했음. 내가 2016년부터 2021년까지 긴 유배(미술재판) 기간에 책을 쓴다는 이유로(『시인 이상(李箱)과 5인의 아해들』) 교향악의 최고봉 구스타프 말러를 공부하며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고르바초프가 당대 유명한 러시아 작곡가들을 놔두고 말러리안(말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통칭)이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경탄함. 우리는 언제나 말러 교향곡 운운할 줄 아는 정치 지도자를 만날까 푸념을 하면서.

어머니와 마릴린 먼로 사진 나란히

그다음 세계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사진도 있음. 내 엄마 김정신 권사님 얼굴 사진과 마릴린 먼로의 얼굴 사진을 나란히 놓고 관람객에게 누가 더 이쁜가 물어보는 의미의 작품임. 또 있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가 찍었는지 모를 조용필 나훈아 조영남(가수라는 동질감 이외에 도무지 다른 조합으로는 불가능할법한) 3인이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음. 물론 미술작품화해서 걸어 놓은 것임. 바로 그 옆 사진이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장영희, 늘 말을 미술소재로 삼았다가 후에 화투 소재로 그림을 그려 우리끼리 화그사협(화투를 그리는 사람들) 회장과 부회장을 나눠 가졌던 김점선, 그리고 한때 행복전도사로 불리며 TV에 출연하곤 했던 최윤희와 찍은 사진도 걸려 있음. 신기하게도 그들 서로 자매처럼 친했던 3인은 2009년, 2010년 몇 개월 차이로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가 세상을 떠남. 이들과 함께 수다 떨며 놀 때가 내 인생의 최정상이었던 듯. 그 아래쪽에 있는 사진은 꽤 오래된 사진. 내가 백남준과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인 바 내가 뭔가를 백남준 선배한테 설명하는 순간 누군가가 셔터를 눌렀던 것으로 추정됨. 얼핏 보면 내가 오히려 선배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 그래서 웃기는 사진임. 여기까지가 내 방 벽화 내용의 끝.

내 방의 벽화는 차후에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 사진들 중에 딱 하나만 고르라는 질문이 들어온다면? 질문은 좋지만 피고의 입장에서 증언을 거부하겠다. 어느 사진을 타인들한테 가장 자랑스럽게 말했나? 그건 고르바초프인 것 같다. 물론 즉흥적인 질문이지만 내 방 빈자리에 앞으로 꼭 걸어놓고 싶은 인물이 있는가?

“있다.”

“그게 누구인가.”

“음….”

“대답하기가 곤란한가?”

“아니다.”

“그럼 대답해주라.”

“당신은 상상을 못 할 거다.”

“그게 누구인데 그러나.”

“손기정이다.”

“마라톤 선수 말인가.”

“그렇다.”

“올림픽 시즌이라서 그런가.”

“…천만에. 아니다. 내 방 벽화를 종로 벽화처럼 그렇게 즉흥적으로 장식하고 싶진 않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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