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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폭등 시대, 홈에 살 건가? 하우스를 살 건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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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8호 22면

인문학자의 과학 탐미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차박’하는 장면. [중앙포토]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차박’하는 장면. [중앙포토]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는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주거 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에 ‘차박(車泊)’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일거리를 찾아 유랑하며 새로운 노마드, 즉 신 유목민이 된다.

코로나19가 공간 개념도 확 바꿔 #집이 사무실·영화관·카페로 둔갑 #상상이 이야기와 건축물을 만들어 #프랑스 롱샹성당, 미술관처럼 설계 #“내가 곧 홈이다”란 마음으로 살면 #신 유목민처럼 멋진 운명 만들 것

그런데 주인공이 자신을 ‘홈리스(homeless)’가 아니라 ‘하우스리스(houseless)’라고 말하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다. 홈은 가고 싶은 곳 어디로든 ‘가져갈 수 있는 집’이지만, 하우스는 땅에 고정된, 자신을 처박아둬야 하는 집이다. 낡은 밴이나 픽업트럭, 화물차나 버스라도, 거주가 해결된다면 신 유목민에겐 그게 ‘집’이다.

아이작 뉴턴

아이작 뉴턴

홈과 하우스가 구분되듯, 근대의 공간 개념도 두 가지로 나뉜다. 아이작 뉴턴의 ‘절대공간’, 그리고 그것을 비판한 J. C. 맥스웰의 ‘장(field)이론’에 등장하는 ‘상대적 공간’이다. 뉴턴은 특정 물체의 위치를 규정하기 위해, 머릿속에 종횡으로 선을 긋고 항상 동일하며 움직이지 않는 절대공간을 상정했다. 그러니까 뉴턴은 GPS 좌표와 같은 절대공간을 전제한 채 움직이는 물체의 경로를 정확히 포착하려고 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이런 절대공간 덕에 정지했는지, 운동했는지, 그리고 운동했다면 어느 정도 가속했는지 등에 따라 수학적으로 서술될 수 있었다.

뉴턴의 절대공간 vs 맥스웰의 상대적 공간

르 코르뷔지에가 만든 롱샹성당. 성당이라는 기존 형식을 파괴하고 주변과 어울리게 만들었다. [사진 민음사]

르 코르뷔지에가 만든 롱샹성당. 성당이라는 기존 형식을 파괴하고 주변과 어울리게 만들었다. [사진 민음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런 좌표계는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90~170년)가 쓴 『지리학』에 이미 등장한다. 그는 도시의 지명 8000곳을 표시하기 위해 위도와 경도의 좌표 체계를 만들었다. 그가 분명히 짚고 넘어갔듯, 좌표 체계는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위치를 서술하기 위해 구축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좌표 체계와 같은 뉴턴의 절대공간이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뉴턴의 절대공간에 대해 흔히 아인슈타인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미 그 이전 시대부터 반발이 빗발쳤다. 19세기 말 에른스트 마흐(1838~1916)는 원운동을 설명하면서 “운동은 절대공간에서가 아니라 운동하는 물체와 주변 물체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측정되는 것”이라고 했다.

지구는 매일 한 바퀴씩 돌고 있는데도 우리가 그 움직임을 느끼진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차 안에 있을 때는 옆에서 다른 차가 조금이라도 앞서가면 바로 그 움직임을 느낀다. 운동을 감지하는 그 힘은, 이렇듯 절대공간을 가정하지 않고  오직 다른 물체와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주민 친화적인 롱샹성당의 내부. [사진 민음사]

주민 친화적인 롱샹성당의 내부. [사진 민음사]

이후 역학 연구자들은 전자기력을 관찰하면서 뉴턴의 절대공간이 아닌 마흐의 상대적 공간 개념과 맥을 같이하는 ‘장이론’을 만들게 된다. ‘장이론’의 핵심은, 자석이나 전도체처럼 특정 물체가 있고 거기에 의존해 어떤 ‘장’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예를 들자면, ‘홈’은 운전하면서 끌고 다니는 ‘차’라는 ‘물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장’과 같다. 물체가 없으면 장도 만들어질 수 없다. 반면 일정 좌표계처럼 이해된 가상의 절대공간은 특정 위치에 묶여 있는 ‘하우스’에 비유될 수 있겠다. 움직일 수 없는 콘크리트 아파트는 바로 그런 절대공간이 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어떤 공간(토포스) 속에 있다. 즉 어떤 장(코라)을 점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에 따르면, 절대 좌표가 있고 나서 거기에 어떤 물체가 속하기보다는, 물체가 있기 때문에 그 물체는 특별한 활동의 장을 형성한다.

J. C. 맥스웰

J. C. 맥스웰

언어와 관련해서 쓸 때 ‘토포스’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어가 있고 거기에 달라붙는 술어가 된다. 주어라는 물체가 있기 때문에 술어라는 의미상의 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히 이해된다. 공간 또는 장소란, 물체에 따라 다니는 술어일 뿐이다. ‘노매드랜드’에서 달팽이집처럼 주인공이 끌고 다니는 낡은 밴도 근사한 집이다. 집은 단지 그 거주자에게 달라붙는 술어와 같은 것(장)이다.

수사학과 철학을 넘나들며 고대부터 중요한 개념이었던 이 ‘토포스론’은 현대에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사회학이나 심리학 등 많은 분야에도 적용되는데, 특히 건축 공간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예를 들어 성당이라면 이전에는 뾰족 첨탑에 스테인드글라스가 강조되었지만, 지금은 사용자(물체)가 어떤 사람들이냐에 따라 그 공간적 특징(장)이 자유롭게 형성된다. 그 결과 어디를 가나 천편일률적인 형태의 시 청사·교회·사찰·성당·학교가 아니라, 지역 환경과 거주민에 특화된 건축물이 하나둘 만들어지고 있다. 객관적인 공간 개념보다는 주체에 따라 상관적이고 주관적인 장소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따라 만든 지도(1482). [사진 민음사]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따라 만든 지도(1482). [사진 민음사]

이런 공간 개념을 가진 대표적 건축가가 르 코르뷔지에인데, 자신을 “토지라는 소리에 울려 퍼지는 건축으로 반응한 음악”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프랑스 롱샹 마을의 롱샹성당(Chaple Ronchamp)이다. 성당 하면 떠오르는 기존 형식을 파괴하고, 주변 언덕 지형에 어울리면서도 그 지역의 물질성이 물씬 풍기도록 했다. 자연의 현재와 고대의 특징까지 고려해 흙의 생명을 머금고 솟아난 버섯처럼 건축한 것이다.

이 성당의 창문은 현대인들이 자주 찾는 미술관처럼 디자인했는데, 이유는 미술관에 자주 못 가는 지역 주민을 위한 배려였다. 그래서 롱샹성당은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이 지역에 가장 어울리는 장소가 됐다. 특정 성당이 주체가 되어 지역 주민들이 거기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주체가 되고 성당이 그곳 사람들에게 술어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코로나19 시대가 되자 공간에 대한 지각력이 바뀌고 있다. 특히 취미와 업무가 모두 집에서 일상화되면서, 집은 사무실·식당·카페가 되기도 하고 영화관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전염병이 창궐하기 전에는 특정 건물을 찾아다녀야 했는데, 이젠 당사자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이 해당 공간으로 바뀐다. 즉 사람이 주어가 되고 그 주변 공간이 주어를 꾸미는 술어가 되어, 사람이 일하면 그 공간은 직무실이 되고 커피를 마시면 카페가 되는 것이다. 직무실이나 카페라는 특정 장소가 고정되어 있기보다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그 쓰임이 달라진다.

이때 새롭게 구성된 공간은 반드시 상상 구조를 거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서 공간을 “토지라는 소리에 울려 퍼지는 음악”으로 구성한 르 코르뷔지에는 토지와 그 주변의 울림에 맞춰 어울림이 있는 장소를 상상한 것이다. 이런 상상 속에서 땅 위에 솟아난 버섯이 만들어지고, 지역 주민이 종교 공간을 미술관처럼 활용한다는 이야기 공간이 형성되더니, 급기야 그 이야기가 물리적 공간에 펼쳐진다. 결국 상상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가 장소를 만드는 셈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사람이 무엇을 하고 어떤 상상을 품는가에 따라 장소는 특이하고 다양하게 건축될 것이다.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집을 욕망하고 있다. 그 집은 어떤 것일까? 절대 공간에 있는 하우스? 아니면 꿈을 따라 펼쳐지는 홈? 고정된 콘크리트 벽과 기둥, 달아오른 집값에 따라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며 오로지 거기에 맞추어서만 산다면, 그 욕망은 하우스가 그렇듯 어떤 특정 GPS좌표계에 못 박혀 버릴 것이다. 그 대신 달팽이집처럼 어디든 유영하는 홈을 욕망한다면, 아인슈타인과 같은 놀라운 통찰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상대성이론을 ‘장이론’을 통해 상상했듯이 말이다.

한 곳에 ‘처박’히지 말고 ‘차박’하는 삶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집을 살(buy) 것인가, 아니면 상상하는 대로 유영하는 집에 살(live) 것인가.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토포스’에 대한 상상이 있다면 저 허름한 고옥(古屋)이라도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채 울려퍼지는 노래가 될 것이다. 상상을 토대로 만들어 나가는 장소일 뿐이지만 평범하게 살거나 투자 대상으로 산 건물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잉태하는 창조물이 될 것이다.

자, 이 순간 우리가 가진 ‘공간 지각력’을 살펴보자. 어떤 장소를 상상하고 어떤 이야기를 꿈꾸는가. 맘속에 계속 어른거리는 장소는 과연 있는지, 구체적으로 그 장소가 무엇인지부터 살피자. “토지라는 소리에 울려 퍼지는 음악”으로 “홈”을 상상하고 서사를 만들 수만 있다면 내가 있는 곳, 아니 “내가 곧 홈이다.” 이게 바로 인생의 엑스트라로 욕구불만에만 ‘처박’히지 않고 보란 듯 멋진 나만의 운명을 만들며 ‘차박’하는 신 유목민, 곧 주인공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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