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호동의 실크로드에 길을 묻다

고려가요에 나온 무슬림, 조선시대에 사라진 까닭은…

중앙일보

입력 2021.08.06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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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동서양 연결한 3대 종교

고려가요 ‘쌍화점’을 모티브 삼아 인간의 욕망을 파격적으로 다룬 영화 ‘쌍화점’(2008). [중앙포토]

고려가요 ‘쌍화점’을 모티브 삼아 인간의 욕망을 파격적으로 다룬 영화 ‘쌍화점’(2008). [중앙포토]

고려시대에 유행한 ‘쌍화점(雙花店)’이라는 노래가 있다. 충렬왕 때 가요로 알려졌는데 노래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 갔더니만,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쌍화점’의 회회아비는 서역 출신
대부·무역업 등 상업활동에 주력
원나라 보호 아래 중국서도 확산
7세기 유입된 기독교는 동력 잃어

소위 남녀 간의 낯 뜨거운 노래라고 해서 조선시대에는 유포가 금지됐다. 쌍화점은 무엇을 파는 가게이며, 회회아비는 어떤 사람인가. 쌍화가 만두나 떡을 뜻하고, 회회아비는 서역 출신의 무슬림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쌍화점’은 중앙아시아 무슬림이 실크로드를 거쳐 한반도까지 와서 장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크로드가 동방과 서방의 문화가 교류하는 장(場)이었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례 가운데 가장 눈에 띄고, 또 오랫동안 파장을 남긴 게 종교 교류와 확산이다. 조로아스터교·마니교 같은 이란 지방 종교들이 중앙아시아로 퍼진 뒤,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당대(唐代) 중국으로 들어와, 현교(祆教)·마니교(摩尼敎)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됐다. 불을 숭상하는 마니교는 후일 명교(明敎)라고도 불렸는데, 몽골의 원나라가 망한 뒤 건국한 명나라 국호의 기원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쌍화점’ 가사가 실려 있는 조선시대 가집 『악장가사(樂章歌詞)』.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쌍화점’ 가사가 실려 있는 조선시대 가집 『악장가사(樂章歌詞)』.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실크로드를 따라 전래한 종교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세계 3대 종교라고 일컫는 불교·기독교·이슬람이다. 불교는 중국 후한 시대에 유입된 이래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승려들이 동방으로 건너와 역경과 설법을 통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현장이나 혜초 같은 중국과 한반도 승려들이 ‘천축(天竺·인도)’을 방문해 불교 경전을 원문으로 익히고 돌아와 마침내 정확하고 읽기에 용이한 한문으로 번역해 널리 유포했다. 교리를 둘러싼 다양한 학설도 잇달았고, 지배층·지식인·평민 사이에 폭넓은 교인을 확보했다. 한·중·일 삼국에서 대승불교는 가장 광범위한 종교가 됐다.

로마 카톨릭이 아닌 동방 기독교

기독교 역시 불교보다 조금 늦은 7세기 전반 당나라 태종 때에 중국에 처음 소개됐다. 그러나 불교 같은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선교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동아시아에 전래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중국에서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동방기독교’였다. 서아시아에서 건너온 사제들은 당나라 조정의 보호를 받으며 큰 도시에 교회를 세우고, 신·구약 가운데 주요 부분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번역문 잔편(殘片)을 보면, 번역 수준이 유치했고 현지 중국인의 반응도 미약했다. 9세기에 일어난 대대적인 박해와 외래 종교에 대한 반동으로 결국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이슬람의 전파는 불교와 기독교의 중간쯤 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처럼 계층·지위 없이 널리 퍼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처럼 온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이슬람은 주로 당·송 시대에 전래하기 시작했고, 육로와 해로를 거쳐 들어왔다. 특히 몽골이 지배하는 원대에 이슬람은 서북 내륙과 동남 해안에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오늘날 중국의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인 회족(回族)의 기원이 됐다.

‘쌍화점’ 가사가 실려 있는 조선시대 가집 『악장가사(樂章歌詞)』.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쌍화점’ 가사가 실려 있는 조선시대 가집 『악장가사(樂章歌詞)』.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3대 종교 가운데 불교는 한반도에서 번창했지만 기독교와 이슬람은 그렇지 못했다. 통일신라나 고려시대 전적(典籍)을 살펴보아도 이 두 종교가 한반도에서 적극적인 포교를 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두 종교는 왜 한반도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일까. 필자의 과문인지 모르겠지만 아직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연구는 없는 듯하다.

기독교(경교)는 사실 중국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니 그 여력이 한반도에까지 미치지 못했던 것이 그다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슬람은 중국에서도 많은 신도를 얻었고, 또 ‘쌍화점’에 나타나듯이 무슬림 상인이 한반도까지 진출했다. 그런데도 이슬람은 왜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까.

중국 역사상 이슬람이 가장 번성할 때는 몽골이 지배하는 원나라 시대였다. 당시 중앙아시아·서아시아 출신의 무슬림은 회회(回回)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 기원은 몽골리아 초원에 살던 유목민 ‘회골(回鶻·위구르)’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초 중앙아시아로 이주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아예 회민(回民), 혹은 회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원대에 들어와 회회 하면 중앙아시아 위구르인은 물론 서아시아의 아랍·페르시아 출신 무슬림들을 총칭하게 됐다.

당태종

당태종

이들은 몽골 지배층의 비호를 받았는데, 이는 그들이 상업활동에 능했기 때문이다. 약탈·조공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몽골인은 재산을 증식하는 방법을 몰랐는데, 그들은 무슬림에게 돈을 빌려줘서 이익을 얻게 한 뒤에 그 상당 부분을 받아갔다. 무슬림은 주로 고리로 돈을 빌려주는 일을 했고, 그런 돈을 가리켜 ‘알탈전(斡脫錢)’이라 불렀다. ‘알탈’이라는 말은 ‘동업자’를 뜻하는 ‘오르톡(ortoq)’에서 나왔다.

고려 중기에 회회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충렬왕(재위 1274~1308)이 원의 황제 쿠빌라이의 딸과 혼인한 뒤 입국할 때 다수의 회회인이 들어왔다. 오늘날 덕수(德水) 장씨의 선조인 장순룡(張舜龍)도 이 황녀를 따라서 온 회회인이었다. 본명이 삼가(三哥)였는데, 이는 ‘셍게(Sengge)’라는 이름을 옮긴 것이다. 그는 위구르 종족에 속하는 무슬림이었다. 회회인이 몽골·고려 조정의 비호 아래 활동한 사실은 『고려사(高麗史)』를 위시한 당시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1276년 원나라 조정에서 한 회회인을 탐라(耽羅)로 보내 진주(珠)를 채취하게 했고, 1279년에는 여러 회회인이 충렬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있다.

회회아비는 만둣가게 운영했을까

중국 동남 지역에 남아 있는 원나라 시대 무슬림 묘비. [사진 중국 취안저우(泉州)박물관]

중국 동남 지역에 남아 있는 원나라 시대 무슬림 묘비. [사진 중국 취안저우(泉州)박물관]

‘쌍화점’에 등장한 회회아비도 몽골 치하 중국에서 건너온 무슬림 상인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몽골 지배층과 제휴하여 고리대금업이나 무역활동을 하던 무슬림이 한반도까지 와서 굳이 만둣가게를 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당시 어느 중국 자료를 살펴도 그들이 만둣가게를 운영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쌍화=떡(만두)’이라는 추정은 조선시대에 상화병(床花餠·霜花餠)이란 떡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자 뜻을 풀어보면 ‘상 위에 놓인 꽃’ ‘하얀 서리꽃’ 같은 떡이다. 쌍화는 그런 의미와 무관하기에 이와 다른 외래 단어의 음을 옮긴 게 아닐까 한다.

쿠빌라이칸

쿠빌라이칸

이런 점에서 원대의 자료에 보이는 살화(撒花)·소화(掃花)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선물’ ‘뇌물’ ‘약탈물’을 뜻하는 몽골어 ‘사우카·사우하(sauqa)’를 한자로 옮긴 말이다. 몽골 귀족이 그런 방식으로 획득한 재산을 무슬림 상인에게 맡긴 투자금을 일컫기도 했다. 쌍화라는 단어가 이것을 옮긴 것이라고 본다면, 회회아비=무슬림 상인이 운영하는 쌍화점은 몽골·고려 귀족의 자본금으로 운영하는 고리대금 점포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가설이 사실로 입증되려면 더 많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고려사』나 ‘쌍화점’에 등장하는 회회, 즉 무슬림이 종교 전파보다 상업 활동에 주력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이 모스크에서 경전을 읽는 모습이 아니라 가게에 들른 여자를 범하는 탐욕스런 회회아비 이미지로 그려진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려가 망하자 더 이상 이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고, 한반도에 이슬람이 뿌리내릴 가능성도 사라진 것 같다.

‘코란, 아니면 칼’은 역사적 근거 부족
‘코란, 아니면 칼!’

이슬람의 전파를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이슬람교는 전쟁을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고,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이슬람 경전인 코란(꾸란)을 받아들이게 하고, 아니면 칼로 죽음을 맞든지 양자택일을 강요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말은 역사적 사실과 커다란 괴리가 있다. 바닷길을 따라 중국 동남 해안 지역에 온 무슬림들은 대부분이 상인이었다.

그들은 무력을 행사하거나, 강압적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현지의 한족들이 이슬람교를 믿도록 했다. 또 실크로드 육로를 따라 전파된 이슬람도 수피(sufi)라고 불리던 수도사들이 현지의 왕과 귀족들을 개종시키며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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