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문화의 창

‘궁모란대병’을 보셨나요

중앙일보

입력 2021.08.05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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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지난 7월에 열린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에서 대한민국을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한다고 결정하였다. 이는 1964년 이 회의가 설립된 이래 반세기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궁중 장식화의 화려한 병풍
오색 찬란한 모란 꽃과 괴석
국립 고궁박물관의 특별전
왕실 의전에서 품격 배워야

그러나 우리 자신이 과연 선진국임을 자부할 수 있는가 라고 자문해 볼 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경제적 성장에 따른 분배와 노동의 문제,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는 정치라는 이름의 저질스러운 논쟁을 보면 아직 멀었다는 냉소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중 선진국다운 나라로 되기 위하여 우리가 깊이 노력해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국가 의전(儀典, protocol)이다. 대한민국이 졸부의 나라가 아니라 선진문화국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의전의 격을 올려야 한다.

모든 국가에는 그 나라의 품격을 보여주는 의례(儀禮)가 있다. 조선왕조에는 다섯 가지가 있었다. 종묘제례의 길례(吉禮), 왕가의 결혼식인 가례(嘉禮), 왕실의 장례식인 흉례(凶禮), 군대의 의장사열인 군례(軍禮),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빈례(賓禮). 이를 국조오례라 하였다. 세종대왕은 이 의례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고 이에 따르도록 했다.

의전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에 따른 제반 형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미술을 예로 들어 본다면 조선왕실의 행사 때는 옥외에 설치하는 여러 종류의 병풍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로 임금이 앉는 자리 뒤에는 반드시 이 병풍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사용된 병풍은 ‘궁모란대병(宮牧丹大屛)’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안녕, 모란’ 전시에 진열된 ‘궁모란대병’. [사진 유홍준]

국립고궁박물관의 ‘안녕, 모란’ 전시에 진열된 ‘궁모란대병’. [사진 유홍준]

본래 모란병풍은 민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혼례식 때 신랑 신부가 맞절하는 초례청에는 꼭 설치되는 ‘국민 장식병풍’이었다. 그중 궁궐의 모란병풍은 도화서의 전문화가들이 제작한 것으로 품격과 스케일이 민간의 그것과 달라 ‘궁모란대병’이라 불렸다.

‘궁모란대병’은 각 폭마다 신비롭게 생긴 괴석을 타고 오른 굵은 줄기에 탐스러운 모란 꽃송이가 최소 아홉 송이가 달려있다. 줄기는 갈색이고 잎은 초록인데 꽃은 빨강·하양·노랑·분홍빛을 띠고 있어 오색이 찬란하다. 어찌 생각하면 촌스러울 것 같지만  ‘궁모란대병’은 그렇지가 않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고 말한 ‘화이불치(華而不侈)’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옛날에는 그림 표구를 장황(裝潢)이라고 하였는데 ‘궁모란대병’을 8폭 병풍으로 장황하면 전체 높이는 2.7미터 폭은 4미터에 이르는 대작으로 된다. 무게 때문에 4폭 병풍으로 장황하기도 하지만 이를 셋 이어 펼치면 10미터가 넘는 12폭 장관을 이룬다.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안녕, 모란’이라는 제목의 특별전(10월31일까지)이 열리고 있는데 전시장을 들어가자마자 ‘궁모란대병’ 네 틀이 펼쳐 보이는 장대한 아름다움에 절로 감탄을 발하게 된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모두 여기 있는 듯한 감동이 있다.

모든 명화는 현대화 같다는 불문율이 있다. ‘궁모란대병’이 모란꽃을 전개해 간 조형어법은 마치 현대미술에서 단일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확대해 나아간 ‘올 오버 페인팅(all over painting)’처럼 다가온다. 요즘 세계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우리 ‘단색조 회화’의 동어반복적 공간경영과 비슷한 조형효과를 내고 있다.

이런 ‘궁모란대병’이건만 관객들은 우리에게 이런 화려함이 다 있었냐고 놀라는 분위기이다. 그동안 검소한 것만이 미덕인양 소박한 아름다움을 강조해 온 조선시대 양반문화에만 익숙하고 궁궐 의전의 높은 품격에 대해서는 소원했던 탓이다. 그리고 좀처럼 ‘궁모란대병’을 볼 기회가 없기도 했다. 다행히 15년 전에 경복궁 내에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됨으로써 비로소 궁중미술의 진수를 이렇게 하나씩 배워가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본래 왕실문화란 그 시대 최고가는 기술과 최고가는 정성과 최고가는 재력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나라 문화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비의 절약만을 강조하고 화려한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면 이런 수준 높은 문화는 창출되지 않는다. 국격을 위해서는 문화에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 정조대왕은 경희궁을 복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궁궐은 화려하고 장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나라의 권위와 품위를 나타내기 위함이지 결코 여기에서 호사를 누리겠다는 뜻이 아니다.”

‘안녕 모란’전에서는 궁중여인의 혼례복, 나전칠기, 도자기 등 왕실공예에 나타난 모란무늬까지 보여주고 있어 안복의 호사를 누리게 되는데 별실로 꾸며진 영상실로 들어서니 미디어아트로 모란이 만발한 정원에서 모란 향기까지 피어나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 박물관들은 이처럼 오감으로 즐기는 전시회로 나아가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대한민국의 전시 디스플레이만큼은 선진국이라 자부해도 좋다는 흐뭇함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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