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킨이 발굴한 14세기 서사시 영화화…"어리석은 남자들, 그러다 죽는다"

중앙일보

입력 2021.08.04 15:39

업데이트 2021.08.04 16:46

5일 개봉하는 영화 '그린 나이트'는 '반지의 제왕' 작가 J.R.R. 톨킨이 현대어로 번역해 세상에 알렸던 14세기 서사시가 토대다.[사진 팝엔터테인먼트]

5일 개봉하는 영화 '그린 나이트'는 '반지의 제왕' 작가 J.R.R. 톨킨이 현대어로 번역해 세상에 알렸던 14세기 서사시가 토대다.[사진 팝엔터테인먼트]

크리스마스 이브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 나타난 초록 나무 형상의 ‘녹색 기사’는 자신의 목을 내리치는 용맹한 자에게 명예와 재물을 주고 1년 후 똑같이 그의 목을 베겠다고 제안한다. 아서왕의 조카이자 무모하고 고집 센 청년 가웨인이 도전에 응한다. 그리고 1년 후 가웨인은 기사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녹색 기사를 찾아 나선다.

5일 개봉 판타지 영화 '그린 나이트'
아서왕 조커 가웨인과 녹색 기사 모험

로워리 감독·각본, 인도계 파텔 주연
"이야기 좋다면 피부색 상관 없어"

기사도 꼬집는 남장여자·귀부인
스웨덴 배우 비칸데르 1인 2역

5일 개봉하는 영화 ‘그린 나이트’(감독 데이비드 로워리)는 14세기 영국의 작자 미상 서사시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를 원작인 작품이다. 중세 영어로 전해오던 2500행의 원작 시는 1925년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 작가 J. R. R. 톨킨이 정리해 재출간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반지의 제왕' 톨킨이 발굴한 14세기 서사시  

영화는 선댄스영화제 촬영상 수상작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 디즈니 판타지 모험영화 ‘피터와 드래곤’ 등을 만든 데이비드 로워리(41) 감독이 각본‧연출을 맡았다. 원작에 없던 말하는 여우, 거인족, 머리가 잘린 호수의 여인 등을 더해 어두운 유혹이 도사린 마술적 세계관 속에서 방탕한 왕족 청년 가웨인의 성장 여정을 새겼다. 아서왕이 상징하는 기독교 국가와 이교 간의 대립과 함께 당대 추앙받던 기사도의 이면도 들췄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라이언’의 인도계 영국 배우 데브 파텔(31)이 주인공 가웨인 역을, ‘툼레이더’ ‘대니쉬 걸’의 스웨덴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33)가 가웨인의 평민 연인 에셀과 가웨인을 유혹하는 귀부인 1인 2역을 맡았다. 북미에선 지난달 30일 먼저 개봉해 첫 주말 사흘간(금~일) 674만 달러(약 77억원)의 박스오피스 수입을 올렸다. 투자‧배급사 A24(‘미나리’ ‘유전’)가 전작인 공포영화 ‘미드소마’로 코로나19 전 거둔 오프닝 성적(656만달러)을 제쳤다.

영화 '그린 나이트'는 영국의 아서왕에 총애 받던 조카 가웨인(데브 파텔)이 크리스마스 이브, 초록 형상의 녹색 기사(사진)가 제안한 도전에 뛰어드는 여정을 그렸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영화 '그린 나이트'는 영국의 아서왕에 총애 받던 조카 가웨인(데브 파텔)이 크리스마스 이브, 초록 형상의 녹색 기사(사진)가 제안한 도전에 뛰어드는 여정을 그렸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도덕적 현실에 대한 신랄한 판타지”(롤링스톤) “마치 미술관에 간 듯한 비주얼”(HCA크리틱) 등 언론의 호평과 함께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는 신선도 90%(4일 기준)를 매겼다. 하지만 ‘카멜롯의 전설’ ‘킹 아더’ 등 기존 중세 무대 할리우드 영화들의 분명한 서사구조와 달리 상징과 은유로 낯설게 이야기를 펼친 탓일까. 일반 관객 신선도는 52%에 그쳤다. 난해함 만큼 겹겹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재미도 크다.

"승리의 대가로 목숨 잃는 게임, 강렬했죠"

원작 서사시에서 성주 버틸락의 하인이었던 캐릭터가 영화에선 말하는 여우로 새롭게 묘사됐다. 원작에서 여러 번 강조되는 성주의 사냥과 자연, 중세 문화와의 관련성을 캐릭터로 암시하기 위해 빚어낸 캐릭터라고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설명했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원작 서사시에서 성주 버틸락의 하인이었던 캐릭터가 영화에선 말하는 여우로 새롭게 묘사됐다. 원작에서 여러 번 강조되는 성주의 사냥과 자연, 중세 문화와의 관련성을 캐릭터로 암시하기 위해 빚어낸 캐릭터라고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설명했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과 주연 데브 파텔을 지난달 18일, 이어 20일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대학교 1학년 영문학 수업에서 ‘일리아드’ ‘오디세이’에 이어 ‘가웨인경과 녹색 기사’를 배웠다는 로워리 감독은 “한 젊은이가 그렇게 터무니없는 내기에 나선다는 내용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승리의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는 게임에 응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20년간 잠들어있던 녹색 기사 이야기는 그가 2018년 3월 디즈니 실사 영화 ‘피터팬과 웬디’ 각본 작업을 하던 중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갖고 놀던 발 킬머 주연의 판타지 모험 영화 ‘윌로우’ 액션 피규어를 장난감 상자에서 꺼낸 게 시작이었다. ‘윌로우’는 신생아를 몰살하는 사악한 여왕에 맞선 이야기로, 조지 루카스가 원안을, 론 하워드 감독이 연출을 맡았던 작품이다. “저만의 판타지 영화를 만들면 얼마나 재밌을까 생각했고 그 주가 끝날 무렵 ‘그린 나이트’ 대본을 쓰고 있었죠.”

각본 집필 과정을 그는 원작과의 대화에 빗댔다. “원작을 읽다 보면 굉장히 현대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서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면서 “원작에 담긴 가치가 어떻게 이 시대 관객에게 울림을 줄지 탐구했다”고 했다.

백인 가웨인에 인도계 배우 캐스팅 이유는 

이번 영화에선 인도계 영국 배우 데브 파텔(가운데)이 그간 주로 백인으로 묘사돼온 가웨인 역할을 맡았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이번 영화에선 인도계 영국 배우 데브 파텔(가운데)이 그간 주로 백인으로 묘사돼온 가웨인 역할을 맡았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가웨인의 피부색도 바꿨다. 안톤 후쿠아 감독의 2004년 영화 ‘킹 아더’에서 배우 조엘 에저튼이 가웨인을 맡는 등 백인으로 묘사돼왔지만, ‘그린 나이트’에선 인도계 파텔이 연기했다. 로워리 감독은 “우리가 얽매여야 하는 역사적 근거가 없어 캐스팅에 개방적이었다”면서 “그전의 아서왕 소재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기사들로 원탁을 채울 좋은 기회였다. 그런 변화가 궁극적으로 플롯을 바꾸지 않는다는 점이 이 소재의 유연성을 잘 보여준다. 이야기만 좋다면 피부색은 상관없었다”고 했다(로워리 감독의 차기작 '피터팬과 웬디'의 팅커벨 역에도 흑인 배우를 캐스팅했다). 긍정적이고 활기 넘치는 캐릭터를 주로 해온 파텔은 각본 초고에서 거의 구제불능으로 설정됐던 가웨인에게 자연스러운 호감을 불어넣었다. ‘킹 아더’에서 가웨인을 맡았던 에저튼을 ‘그린 나이트’에서 가웨인을 시험에 들게 하는 성주로 캐스팅한 것도 의도적이었다고.

"어리석은 남자들은 그러다 죽죠" 

기사도 정신 이면에 놓인 남성성에 대한 신화도 꼬집는다. “왜 위대해져요? 좋은 걸로 부족해요?” “어리석은 남자들은 그러다 죽어요.” 신분이 높은 가웨인의 곁을 지키기 위해 하인처럼 남장까지 불사하는 에셀은 명예욕에 눈이 먼 연인을 이렇게 꼬집으며 슬퍼한다. 로워리 감독은 “남성성에 관한 이슈는 오늘날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다”면서 “우리가 길을 잃고 간과하거나 잘못했을 수도 있는 부분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연기한 1인 2역 중 가웨인을 유혹하는 귀부인이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연기한 1인 2역 중 가웨인을 유혹하는 귀부인이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파텔은 “가웨인은 (남성이자 왕의 조카라는) 특권을 누리지만, 주변의 똑똑한 여성들 때문에 초라해진다. 덩치만 큰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인다”면서 정반대 모습으로 가웨인을 궁지에 몰아넣는 비칸데르의 1인 2역에 대해 “훈련받은 무용수처럼 정확했다. 억양과 신체를 바꾸는 게 놀라웠다”고 평했다.

‘그린 나이트’의 아서왕은 기존의 정의로운 영웅과 거리가 멀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등 영화에서 악역을 자주 해온 영국 배우 숀 해리스가 맡아 음침하고 퇴색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웨인이 맞닥뜨리는 처참한 전장의 시체들은 아서왕이 혼자 960명을 죽였다고 전해지는 바돈 전투에서 따왔다. 미국 연예매체 배니티페어와 인터뷰에서 로워리 감독은 “평화로웠다”고 묘사돼온 아서왕의 통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도록 (캐릭터를)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목 베기 장면, 편집만 1년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서 가웨인이 녹색 기사의 목을 베는 장면은 편집에만 1년 가까이 걸렸다. 영화의 독특한 환상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하는 중요한 장면이어서다. 2019년 6월 첫 편집본에서 20분 분량으로 만들었지만, 만족하지 못한 로워리 감독은 코로나19로 개봉이 1년간 밀린 사이, 이미 편집이 끝났던 영화를 다시 열어 완전히 바뀐 지금의 버전으로 완성해냈다. 서사시가 원작인 영화답게 시적인 운율도 편집으로 매만졌다.

5일 개봉하는 영화 '그린 나이트'는 '반지의 제왕' 작가 JRR 톨킨이 현대어로 번역해 세상에 알렸던 14세기 서사시가 토대다. 영국의 아서왕에 총애 받던 조카 가웨인(데브 파텔)이 크리스마스 이브, 초록 형상의 녹색 기사가 제안한 도전에 뛰어드는 여정을 그렸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5일 개봉하는 영화 '그린 나이트'는 '반지의 제왕' 작가 JRR 톨킨이 현대어로 번역해 세상에 알렸던 14세기 서사시가 토대다. 영국의 아서왕에 총애 받던 조카 가웨인(데브 파텔)이 크리스마스 이브, 초록 형상의 녹색 기사가 제안한 도전에 뛰어드는 여정을 그렸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가웨인의 장대한 여정이 압축되는 결말 부분에선 기억과 시간에 대한 색다른 해석도 보여준다. 인간의 시공간을 유령의 관점으로 재해석했던 전작 ‘고스트 스토리’에 이어서다. 비칸데르는 “로워리 감독은 원작 시에 필적하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대본에서 읽은 장면들이 촬영장에 마술처럼 나타났을 땐 글로 읽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의미를 깨닫게 됐다”고 돌이켰다. 로워리 감독은 “이 영화는 피할 수 없는 결론으로 가는 여정에 관한 것”이라며 “산 사람이 숲에서 뼈 더미가 되는 시간은 우주적 차원에서 볼 때 단 1초 정도면 된다. 우리는 사라져 먼지가 될 것이고 머잖아 땅에 이끼가 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런 우주적 스케일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린 나이트' 촬영 현장에서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의 모습이다. [AP=연합]

'그린 나이트' 촬영 현장에서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의 모습이다. [AP=연합]

‘그린 나이트’의 가웨인은 원작에서 진정한 기사도를 깨닫고 녹색 기사를 떠났던 가웨인경과는 조금 다른 결말을 맞는다. 기독교 세계에 도전한 이교도적 망령은 오만한 인간들에 대한 단죄를 벼르고 있는 대자연의 은유처럼도 느껴진다. 영화 ‘배리 린든’ ‘엑스칼리버’를 촬영했던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근교 지역 ‘위클로주’의 고풍스러운 풍광과 악천후는 이번 영화에 그런 자연의 힘을 깊이 있게 불어넣었다.

영화 '그린 나이트'에서 시간의 흐름을 압축적 방식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영화 '그린 나이트'에서 시간의 흐름을 압축적 방식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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