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사치품 풀어줄 필요있다" 유엔제재 깨도 된다는 정보수장?

중앙일보

입력 2021.08.04 14:33

업데이트 2021.08.04 19:28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북한에) 사치품으로 인식되는 생필품도 풀어줄 필요가 있다" "한ㆍ미 연합훈련을 중단하면 북한이 상응 조치를 할 것" 등의 발언을 한 게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보기관장으로서 적절한 발언인지를 두고서다. 야권에선 "월권" 지적도 나온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모습. 연합뉴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모습. 연합뉴스.

박 원장은 3일 국회 정보위에서 지난 2006년부터 제재로 인해 대북 유입이 막혀 있는 사치품에 대해 "사치품으로 인식되는 생필품도 풀어줄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정보위원들이 전했다. 이들에 따르면 박 원장은 구체적으로는 "고급 양주와 양복"이라며 "김정은 위원장 혼자 소비하는 게 아니라 평양 상류층 배급용, 상류층의 생필품"이라는 이유를 댔다.

"사치품 인식되는 생필품"..어폐 논란
"연합훈련 유연 대응" 발언에 "월권" 비판도

우선 "사치품으로 인식되는 생필품"이라는 말 자체에 모순이 있을 수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으로의 유입을 금지하는 사치품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북한의 일반 주민들이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의 가격인지' 여부를 살펴본다.
지난달 3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37만 9000원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된다. 박 원장이 언급한 고급 양주와 양복은 물론이고, 귀금속, 스포츠 장비 등이 모두 사치품에 해당하는 셈이다.

반면 생필품의 사전적 정의는 '일상생활에 반드시 있어야 할 물품'이다. 박 원장이 쓴 "사치품으로 인식되는 상류층의 생필품"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런 정의와는 맞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유엔이 대북 사치품 유입을 금지한 건 북한 지도부가 간부들에게 사치품을 나눠주며 충성을 유도하는 소위 '선물 통치' 행태를 막기 위한 취지도 있었다. 하지만 박 원장의 설명은 북한식 선물 통치의 기능을 사실상 인정하는 것으로, 자칫 제재의 정신을 무시하는 것같은 인상을 줄 여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주영국 북한 공사 출신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3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북한에 사치품이 들어가면 평양의 상점을 통해 평양의 신흥 부르주아인 '돈주'들에게 팔아 김정은 위원장의 호주머니를 채우거나, 간부들에게 나눠줘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식으로든 통치 자금으로 활용될 것이란 뜻이다.

국제사회가 사치품 관련 제재 위반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3월 말레이시아는 외교 관계를 끊겠다는 북한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북한으로 사치품을 보내기 위해 제재를 위반한 혐의를 받는 북한 사업가를 미국으로 넘겼다.

지난 6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주재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지난 6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주재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정보위 소속 의원들에 따르면 박 원장은 또 이달 중순으로 예정된 한ㆍ미연합훈련에 대해서도 "북한 비핵화의 큰 그림을 위해선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1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훈련 중단을 요구한 데 대해서도 "중단할 경우 남북관계와 관련한 상응 조치 의향을 표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정보기관의 수장이 수집한 정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거나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보에 대한 주관적 해석까지 표명한 것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  

정작 한ㆍ미 연합훈련 주무 부처인 국방부는 코로나19 상황과 연합방위태세를 고려해 "한ㆍ미가 협의로 결정한다"는 신중한 입장이다.
이와 관련, 통일부도 지난달 30일 고위 당국자가 기자들과 만나 "훈련 연기가 바람직하다. 연기 후 대북 관여를 본격화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는 했지만, 통일부는 남북관계 개선에 중점을 두는 정책부처라는 점에서 국정원과는 역할 자체에 차이가 있다.

다만 박 원장은 지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지난 수십년간 물밑에서 북측과 소통하고 협상을 벌여온 경험이 있다. 애초에 문재인 대통령이 그를 국정원장에 임명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박 원장은 남북 간 통신연락선 복원으로 모처럼 대화 재개의 기회가 마련된 만큼 북한의 입장을 고려, 대화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고려해도 현직인 정보 기관장으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하며 말을 아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나온다. 특히 연합훈련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 정부가 함께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라는 점에서다.

미국 국방부도 3일(현지시간) 한ㆍ미 연합훈련에 대해 아직 한국으로부터 훈련 중단 요청을 받은 바가 없으며 모든 결정은 한국 정부와 협의 하에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북한 관련 현안보고를 준비하는 모습. 뉴스1.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북한 관련 현안보고를 준비하는 모습. 뉴스1.

이날 박 원장의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자 직후 관련 부처들이 잇따라 수습에 나서는 상황도 벌어졌다.
외교부는 "한ㆍ미 협의 과정에서 제재 면제 논의는 이뤄진 바 없다"고 밝혔다. 박 원장이 북한의 사치품과 생필품 제재 요구를 언급한 데 따른 반응이다.
박 원장은 이날 남북 통신선 복원에 대해 "김정은 위원장이 요청한 것"이라고도 말했는데, 이에 대해 통일부는 "양측이 서로 충분히 협의하고 합의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야권의 비판은 더욱 거셌다. 국회 정보위 야당 간사인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4일 SNS에 "정보기관이 왜 대북정책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가"라며 "명백한 월권"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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