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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가가 약속 어겼다” 평택기지 이주민 손들어준 법원

중앙일보

입력

황경회 평택미군기지이주민 비상대책위원장이 경기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고향집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 이수정 기자.

황경회 평택미군기지이주민 비상대책위원장이 경기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고향집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 이수정 기자.

“나라에서 미군에 땅을 내줘야 한다니까…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래야 하는 줄 알고 했지”

그가 가리킨 고향집 자리에는 미군기지가 들어서 마을이 통째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경기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서 나고 자란 황경회(61)씨 이야기다. 벌써 15년 전 일이지만 반세기를 살던 고향집을 떠나던 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평택 주한미군기지로 갈곳 잃은 대추리 이주민들 #'신도시 상가위치선택권' 약속 어긴 정부에 승소

2004년 10월 노무현 정부는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미군의 서울지역으로부터의 이전에 관한 협정’을 서명하고 같은해 12월 국회 비준을 거쳐 서울 용산 등 주한미군 평택 이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국무총리실에는 주한미군 대책기획단이 꾸려졌다.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를 필두로 주한미군 대책위원회가 열렸다. 국방부 등 14개 부처 장관, 서울특별시장과 경기도지사가 모인 범정부적 규모의 위원회였다.

당시 정부는 대추리에 연일 사람을 보내 공청회를 열고, 팸플릿을 돌리며 이주 계획을 홍보했다. 경찰공무원이었던 황씨는 “정부 정책에 반대할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저 정부가 가져온 계획안을 ‘국가의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살던 집과 농토를 내주고 떠났을 뿐이다. 그런 그는 왜 고향을 떠난지 15년 만에 국가를 상대로 소송까지 한 걸까.

평택 이전 급했던 정부 15년전 '상가 위치선택권' 약속

2006년 주한 미군기지 이전지역인 평택 팽성읍 대추분교에 공권력 투입이 임박한 가운데 3일 주민들이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6년 주한 미군기지 이전지역인 평택 팽성읍 대추분교에 공권력 투입이 임박한 가운데 3일 주민들이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중앙포토]

당시 평택미군기지 이전사업을 둘러싸고 이전 대상지인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은 양쪽으로 나뉘었다. 정부안에 따라 순순히 땅을 내준 황씨같은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살던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도 많았다. 반발이 극심하자 정부는 미군이전평택지원법이라는 특별법까지 만들었다. 기존 토지 수용 보상안에 더해 “국방부 장관이 이전 대상 주민들을 위해 ‘이주대책 및 생활대책’을 수립·시행해야 한다”도 포함했다.

이에 국방부는 주민들에 “정부안에 따라 정해진 기간 내에 협의매수에 응한다면 추후 평택 신도시 개발 때 8평가량의 상업용지에 대한 위치선택우선권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토지수용에 대한 보상만으로 주민들이 다른 지역에서 제대로 정착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정부가 먼저 꺼낸 생계대책이었다. 약 400여명의 주민은 2006년 이 약속을 믿고 땅을 넘기고 고향을 떠났다.

이미 반으로 쪼개진 대추리에서 이주에 반대한 주민들은 떠나는 주민들에게 돌을 던지고 손가락질을 했다. 반대 주민의 공격을 피해 야반도주하듯 고향을 떠난 주민도 많았다. 그들에게 남은 건 국방부 장관이 ‘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생활대책 대상자’라고 확인한 ‘적격 통보’뿐이었다.

10년 뒤 LH “신도시 경쟁 추첨해야” 알짜땅 분양 마쳐

주한미군 평택기지 이주민들 행정소송 경과.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주한미군 평택기지 이주민들 행정소송 경과.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종이 한장, 정부 약속만 믿고 기다리기를 10년이 지났다. LH공사는 2016년 말 이주민들에게 따로 통지하지 않은 채 ‘평택 고덕 신도시 근린상업용지 분양 공고’를 냈다. 공고에는 평택 이주민에 대한 약속은 없었다.

2017년 정부와 LH공사는 “미군기지 이주민들에게 위치선택우선권을 줄 수 없고 분양에 경쟁이 있으면 추첨으로 처리할 것”이라며 말을 바꿨다. 황씨가 평택 이주민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정부를 향한 소송에 나서게 된 배경이다. 그는 “같은 동네 주민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정부 말에 따랐는데 10년이 지나 말을 바꾸니 배신감이 더 컸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분양에 참여하지 않는 사이 LH는 고덕 신도시 부근의 ‘알짜 상업용지’를 차근차근 분양해나갔다. 이미 분양된 땅에는 평택 삼성전자 산업단지 인근 상업용지 등이 포함됐다. LH로서는 주민들에게 감정가에 땅을 분양하는 것보다 일반에 경쟁 입찰로 분양하는 것이 공사에 훨씬 이득인 셈이다. 황씨는 “잘 팔리는 땅은 먼저 팔아버리고 남는 땅 가져가려면 가져가라는 심보”라고 비판했다. 이 사건을 잘 아는 한 법조인은 “공공기관인 LH의 행태가 마치 마피아 같았다”고 말했다.

‘사업 시행은 LH에 위임’ 발 뺀 국방부에 LH ‘나 몰라라’

법정에 선 LH공사와 국방부는 서로 책임을 미루기 바빴다. 주민들과 직접 약속한 국방부는 “구체적인 사업 시행 내용은 LH공사에 위임했다”면서 책임을 회피했다. 시행을 맡은 LH공사는 이주민들에 “국방부와 협약은 LH를 법적으로 구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미 ‘주민 설득과 이주’라는 숙제를 완료한 국방부는 발을 빼고, 분양 주도권을 쥔 LH는 “내가 한 약속이 아니다”라며 나 몰라라 하는 모양새였다.

답답해진 주민들은 당시 국방부 주한미군 대책기획단에서 일했던 정부 관계자들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당시 기획단의 몇몇 고위 관계자들이 법정에 나와 “당시 정부가 조속히 사업을 추진해야 할 필요가 절실했고, 그래서 주민들에게 땅을 협의 양도하면 가장 좋은 상업용지를 우선해서 선택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고 설명했다”는 증언을 했다. 이 밖에도 정부가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과 주한미군기지 이전사업백서, 공공기관이 남긴 수 많은 공문이 증거가 됐다.

법원 “LH, 국방부 장관 약속에 구속돼…이주민 우선권 확인”

지난해 1월, 2년여의 심리 끝에 1심을 담당한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당시 재판장 함상훈)는 “원고들은 주한미군시설사업으로 인한 생활대책으로 위치선택우선권을 가진 생활대책수급대상자 지위에 있음을 확인한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LH공사는 항소했지만 최근 서울고법 행정1-1부(부장 고의영ㆍ이원범ㆍ강승준) 역시 LH공사의 항소를 기각했다.

황씨는 1심 재판이 마무리되던 때를 잊지 못한다. 국가가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아 ‘내지 않아도 될 소송’을 내고 2년간 수차례 평택과 서울 양재동을 오가며 꼬박꼬박 재판에 참석한 터였다. 당시 함 재판장은 황씨를 비롯해 재판에 참여한 주민들에게 재판 마지막 날 발언할 기회를 줬다. 황씨는 “개인의 약속도 아니고, 일개 면서기의 약속도 아닌 국무총리실에서 약속한 것인데 이를 정부가 지키지 않는다면 그건 나라가 아니지 않으냐. 국민들이 그럼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법원도 당시 국가가 이주민들을 총력을 다해 설득했던 상황의 특수성을 인정했다. 법원은 “이 사건은 다른 공익사업과 달리 국가 간 협정의 형식으로 사업 완료 시한이 주어져 있었고, 시한을 지키는지는 국가적 신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국가는 협의양도인에게 특별지원대책을 마련해 조속히 미군기지 이전부지를 확보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국방부 장관 등은 반대 집회가 끊이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위치선택우선권이 있는 상업용지 분양'을 주민들을 설득할 ‘사탕발림’으로 제시했고, 주민들도 당연히 ‘누구보다도 우선한 위치 선택권’으로 이를 이해하는 상황이었다는 취지다.

법원은 “구체적인 분양은 LH의 권한”이라는 LH 측 주장도 배척했다. 서울고법은 “LH공사는 국방부로부터 사업을 위탁받은 기관으로, 국방부 장관이 원고들에게 공언한 위치선택우선권의 내용에 구속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국방부 장관의 공언은 국방부와 LH 간 협약이 있기 전에 이뤄졌다.

재판부는 “국방부와 LH 사이 사후적으로 체결된 협약 내용에 따라 원고들의 권리가 변경된다면 국가기관의 내부 위탁관계에 따라 원고들의 구체적 지위를 불안정하게 할 위험이 있어 허용되기 어렵다”고 분명히 했다.

행정소송 승소에도…손해배상 받으려면 별도 소송

이번 판결은 평택미군기지 이주민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 중 승소한 첫 판결이다. 하지만 LH 측의 상고로 재판은 대법원 판단까지 받게 됐다.

황씨가 고법에서 승소했어 웃지 못하는 다른 이유도 있다. 이미 신도시 부근 주요 상업용지는 분양이 완료돼 개발이 끝난 상태여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주민들은 국방부의 확약을 법원이 인정한 것을 근거로 LH공사 및 국가를 상대로 또 다른 손해배상 소송을 내서 이겨야 한다. 미군기지 건설에 땅과 집을 내준 주민들은 ‘공짜 땅을 달라’는 것이 아님에도 십수 년째 정당한 약속을 이행 받지 못하는 셈이다. 주민들을 대리해 1·2심을 이기고 손해배상 소송도 진행 중인 김하늘 변호사(법률사무소 해들)는 “국가가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져버릴 수 있다면, 국가의 존재이유는 없다는 생각으로 주민들을 대리했다”고 설명했다.

황씨에게 국가의 약속이란 무엇일까. 황씨는 2004년 평택 주민들에 대한 설득이 한창일 때 쓰인 한 기사를 꺼내 들었다. 2004년 7월 문재인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평택대책위를 만나 면담한 내용의 기사다. 당시 문 수석은 “미군기지 이전 사업은 양 국가 간 진행 상황이라 중단할 수 없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사업을 진행할 뿐”이라고 반대 측 사람들을 설득했다. 황씨는 “내가 바로 이 정부의 말과 약속을 가장 잘 믿었던 사람인데 결국은 소송 중이다”라며 “끝까지 가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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