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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의 ‘유감 표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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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청해부대의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알려진 다음 날인 지난달 16일 오후 국방부 대변인실은 기자들에게 문자 공지를 보냈다. “청해부대 장병 대상 백신 접종 관련, 해외에서 임무 수행 중인 부대와 현지의 상황, 그리고 우리 군의 방역 노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파병 장병들에게 백신을 보내지 않는 등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서 일부에서 보도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함”으로 시작하는 공지였다. 집단 감염 사태가 보도된 뒤 국방부가 내놓은 반응은 외려 ‘유감 표명’이었다.

집단확진 보도 다음날 내놔 #‘군 방역 노력 폄하’로 반발 #군의 언어에 정치 언어 등장 #국민은 유감 아닌 믿음 원해

‘유감 표명’은 말 그대로 ‘감정이 있다’는 얘기다. 관가·외교가 용어로 ‘유감 표명’은 ‘불쾌하다, 불편하다’는 취지이고, 은근한 경고도 담겨 있다. 군은 왜 유감 표명을 했는지를 이 문자 공지에 꼼꼼하게 담았다.

청해부대는 군 의료진·장병 예방 접종 이전인 2월에 출항했으니 사전 접종이 불가능했고, 함정 내에선 백신 보관이 쉽지 않으며, 30세 미만 장병이 맞는 화이자 백신은 초저온 냉동고를 별도로 비치해야 했다 등등을 설명했다. 청해부대원 34진 백신 접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군은 장병 안전에 최선을 다했다는 취지의 해명이었다.

해외에 파병된 해군 청해부대 34진 장병 301명이 승선했던 문무대왕함. [연합뉴스]

해외에 파병된 해군 청해부대 34진 장병 301명이 승선했던 문무대왕함. [연합뉴스]

군의 해명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다른 부처는 몰라도 군이 할 소리는 아니다. 군은 사후 해명이든 설명이든 별 의미가 없는 마지막 보루다. 사후 해명으로 군이 맞닥뜨린 현실이, 군이 치른 승패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구구절절 해명하고 이해를 구한들 승조원 301명 중 272명, 90%가 감염됐던 집단 확진 사태는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해명과 유감 표명이 재발 방지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고, 장병 안전을 유지하는 게 군의 임무이지, 열악한 상황과 조건을 사후에 해명하는 게 군의 역할은 아니다.

사실 군은 청해부대 집단 확진을 놓고 유감 표명부터 할 처지가 아니었다. 바로 직전 성추행 피해 여군 중사 사망 사건으로 서욱 국방장관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군내 뿌리 깊은 남녀 불평등과 성추행 불감증, 위계에 의한 일방적 지시 문화가 결합돼 이같은 비극적 결과가 빚어졌는데, 군이 재발을 막을 자정 능력을 갖고 있는지 의심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엔 북한 주민이 강원도 바닷가로 헤엄쳐 넘어온 ‘헤엄 귀순’을 막지 못했고, 이런 와중에 격리 장병 부실 급식을 놓곤 장관이 사과까지 해야 했다.

여론의 비판에 대응해 반박하는 건 정치의 언어이지 군이 할 말은 아니다. 여야가 불리한 이슈를 맞닥뜨렸을 때 ‘네탓’을 하면서 원인을 상대에게로 돌려 논점을 흐트리는 여의도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이다. ‘민주당이 원내 협상을 파기했다’ ‘약속을 안 지킨 건 국민의힘’이라거나 ‘가짜뉴스’로 몰아가는 것이다. 대립과 갈등 국면을 만들어 지지층을 결집한 뒤 불리한 상황을 빠져나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정치권이 아닌 정부, 더구나 군이 정책의 실패를 놓고 책임을 다른 쪽으로 돌리면서 지지층 결집을 통해 해결하려 하면 나라가 엉망이 된다. ‘과거 정부 탓’ ‘투기꾼 탓’ ‘언론 탓’으로 돌리면서 진짜 해법을 찾지 않으면 상황은 계속 악화하고 나라는 짝짝 쪼개진다. 지지층은 박수를 치며 호응할지 몰라도 반대 진영엔 분노가 누적된다. 무엇보다도 그 어떤 현란한 논리와 수사로 공격하건 고장 난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네탓’ 대응은 한계가 심각하다. 즉 지지층을 설득해 현실을 대신한 ‘가상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엄중한 현실은 그대로다.

이런 점에서 군의 언어에서까지 정치의 언어가 느껴지는 건 대한민국의 퇴행이다. 국방부가 ‘유감 표명’까지 내놓은 걸 보면 청해부대 집단 확진 사태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확산하는 걸 막기 위해 선제적으로 입장을 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국방부가 굳이 여론전에 나설 필요가 없다. 국민은 항상 군에 감동할 준비가 돼 있다. 연평도 포격전 때 불붙은 진지에서 K-9 자주포를 움직이던 장한 해병의 사진에 지금도 우리는 울컥한다. 국민이 원하는 건 해명이 아니라 믿음이다. 제발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