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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메달도 좋아, 난 네게 반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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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관전 문화가 달라졌다 

“메달과 그 색으로는 잠재력을 평가할 수 없어요. 이미 잠재력을 보여줬어요.” “크고 빛나는 도전이었기에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자랑스러웠습니다.”

성적 상관없이 도전 스토리에 박수 #우상혁·김수현에 “내 맘 속 금메달” #꼴찌 럭비팀엔 “올림픽정신 그 자체” #요트·럭비 등 비인기 종목도 응원 #“패자 위로하는 문화 세계적 추세” #Z세대 선수들도 올림픽 자체 즐겨 #황선우 “100점 만점에 130점” 자평

2020 도쿄 올림픽 역도 여자 76㎏급 경기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 등으로 동메달을 놓친 뒤 눈물을 보인 김수현(26) 선수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이 같은 팬들의 격려 메시지가 넘쳐나고 있다. 한 네티즌은 “본인 탓하지 말고 창피해 하지도 말아라. 우리에게는 당신이 금메달”이라는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1등이 아니면 주목하지 않던 올림픽 관전 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은메달을 따면 선수를 비난하던 과거와는 다르게 도전 그 자체에 의의를 두고 대회를 즐기는 분위기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이전과 달리 ‘노메달’인 선수도 관심의 대상이 된다. SNS 등 온라인에서는 “선수 SNS를 찾아가 응원 메시지를 남겨서 힘이 되자”며 독려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2m35㎝를 넘어 4위를 기록한 우상혁(25) 선수다. 우 선수는 3위 선수와 2㎝ 차이로 메달을 놓쳤다. 그러나 그에게는 질책보다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우 선수가 “높이 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남긴 SNS 소감에는 “내 마음속 금메달이다” “국가대표를 해줘서 감사하다”와 같은 댓글이 줄이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우상혁 선수의 SNS를 팔로잉해야 한다. 그래야 후원도 늘고 광고도 붙게 된다”는 제안도 나왔다. 25년 만에 한국 신기록을 세우는 기량을 뽐냈지만, 올림픽 메달 포상금이나 연금, 군 제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우 선수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뜻에서다. 이 글에는 “나도 (팔로잉) 완료했다”는 인증과 호응이 뒤따랐다.

대중의 관심은 인기 종목 선수나 어린 선수들에게만 쏠리지 않는다. 남자 요트 하지민(32) 선수나 ‘아름다운 꼴찌’ 럭비 대표팀 등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게도 응원이 잇따른다. 이들에겐 “올림픽 정신 그 자체” “출전 자체가 자랑스럽다”와 같은 선플이 수백 개 달렸다. 효자 종목으로 꼽혔던 유도·레슬링·태권도 등이 부진한 성적이라고 해서 이를 꾸짖는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도 아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한국 올림픽 메달 순위에 신경쓰지 않는 이도 적지 않다.

상금 없는 4위 우상혁…팬들 “후원 늘게 SNS 팔로잉” 제안 

올림픽 관전 문화가 달라졌다

올림픽 관전 문화가 달라졌다

메달 색깔이나 경기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든 결과다. 올림픽 주요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본다는 30대 직장인 김모씨는 “메달 소식이 기쁜 건 맞지만, 순위나 성적보다는 선수들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보는 것이 더 즐겁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흐름에 대해 올림픽 성적을 국가 명운이나 국격과 동일시하던 민족주의적 경향이 과거보다 옅어지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분석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1등을 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생각보다는 저마다의 입장에서 자신이 즐거움을 추구하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올림픽 관전 문화가 바뀐 것 같다. 시대적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윤수 단국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대중이 ‘금메달’이라는 표현보다 ‘메달’이라고 하는 등 성적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높게 평가하고 스포츠를 즐기는 방향으로 관전 문화가 바뀌고 있다”며 “승자를 인정하고 패자를 위로하는 문화는 전 세계적인 추세”라고 평가했다.

올림픽 참가 선수들도 달라졌다. 많은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 선수들은 올림픽 출전 자체를 즐겼다. 황선우는 수영 자유형 200m에서 150m 구간까지 선두를 질주한 뒤 “‘노빠꾸 질주’였다. 객기 질주인가? 정말 뒤를 생각하지 않는 레이스였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 없다. 100점 만점에 130점을 주고 싶다”고 자평했다. 그는 경기 직전 “다 받아들이고 즐겨라. 어차피 해야 하는 거고, 어차피 힘든 거니까, 인상 쓰지 말고”라고 되뇌곤 한다. 양궁 선수 안산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자신의 좌우명을 “좋아하는 건 좋아하면서 살자”라고, 김제덕은 “후련하고 후회 없이 쐈다. 대한민국 빠이팅~”이라고 말했다.

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 출신 유승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은 “예전 선수들은 메달을 못 따면 주눅이 들었다. 요즘은 승패보다 올림픽 자체를 즐긴다”고 전했다.

김유겸 서울대 체육학과 교수는 “과거 국가대표는 국가라는 ‘짐’을 짊어졌지만 요즘 선수들은 전과 같은 중압감을 갖지 않는다”며 “팬들도 이제는 노력하는 모습에서 감동과 스토리를 찾으려고 한다. 선수도, 팬도 다양성을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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