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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제자 40명 테마파크 무료 입장 요구한 ‘몰염치’ 교수님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손웅익의 작은집이야기(48)  

모대학의 문화컨텐츠학과 교수가 국내 굴지의 테마파크를 한 번도 관람한 적이 없다며 40명의 학생을 무료 입장 시켜줄 수 없냐고 문의해왔다. [사진 pixabay]

모대학의 문화컨텐츠학과 교수가 국내 굴지의 테마파크를 한 번도 관람한 적이 없다며 40명의 학생을 무료 입장 시켜줄 수 없냐고 문의해왔다. [사진 pixabay]

어느 포럼 자리에서 모 대학 문화컨텐츠학과 교수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당시 나는 유명 테마파크의 부사장이었다. 처음 인사를 나누는 자리임에도 그 교수는 매우 친근하게 다가왔다. 테마파크의 디자인과 운영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고 건축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며칠 후 그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학과 학생 40여 명을 데리고 구경을 가겠다고 했다. 입장료를 50%로 할인해 주겠다고 했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 그 교수는 학생들의 무료입장을 기대하고 전화했던 모양인데 입장료를 할인해 주겠다는 나의 대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입장료가 얼마냐고 물었다. 입장료를 알려줬더니 그렇게 비싸냐고 하면서 혼자서 먼저 구경해 보고 입장료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학생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 속내를 간파한 내가 교수님은 무료로 입장시켜 드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그 교수는 테마파크를 방문하지 않았다.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그 학과를 졸업한 후 진출할 수 있는 분야가 죽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에 테마파크도 있었다. 그 교수는 국내 유명 테마파크에 40여 명이나 되는 제자를 무료로 입장시킬 만한 자기의 인맥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컨텐츠학과 교수가 국내 굴지의 테마파크를 한 번도 관람한 적이 없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문화컨텐츠를 대하는 태도에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 교수의 행태는 이런 경우와 비슷하다. 가령, 어떤 자리에서 인사를 나눈 유명 식당 지배인에게 며칠 후 전화해 학생 40여명을 데리고 갈 테니 음식을 공짜로 달라고 부탁했다고 치자. 식당 지배인이 할인해 주겠다고 하니 그 음식 가격이 얼마냐고 묻고 나서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음식이냐고 되묻는 것과 뭐가 다를까. 컨텐츠를 즐기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교수라면 그 원칙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추측건대 일부 공연, 전시장의 경우 그 교수의 요청에 무료 관람을 허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일은 비단 그 교수만의 경우가 아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여러 경로로 내가 몸담고 있던 테마파크에 무료 입장을 요청해왔다. 그들은 테마파크나 공연장에 공짜로 입장했다는 사실을 자랑거리로 떠들고 다니고 있다.

건축설계 분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소위 가설계라는 것인데, 건축용어에는 없지만 건축계에 통용되는 용어다. 필지 관련 서류 검토, 건축법규 검토, 규모와 용도 검토, 배치도 평면도, 단면도 등 기본적인 도면을 가설계라고 부른다. 건축설계를 단계별로 구분하자면 기획설계, 계획설계, 실시설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굳이 분류하자면 가설계는 기획설계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모든 디자인은 기획단계가 가장 중요하다. 디자인에서 기획단계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축의 기획단계, 소위 가설계 도면에는 오랜 세월 축적된 건축사의 노하우가 압축되어 담겨있다. 이렇게 중요한 설계단계를 가건물, 가등기처럼 임시적이고 가짜나 거짓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가(假)자를 붙여 가설계라는 용어로 부르고 있다. 용어자체를 이렇게 가볍게 부르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가설계는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축주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건축사에게 있다.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기획설계를 무료로 제공하는 건축사가 많기 때문이다. 건축설계는 의사나 변호사처럼 진료나 상담에 따른 시간비용을 철저하게 계산해 청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건축사가 자기의 노하우를 담았다고 확신한다면 금액의 과다를 떠나 상징적으로라도 기획설계의 대가를 청구하는 것이 건축후배와 건축계의 미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벽돌공에게 인건비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당연시하면서도 벽돌 쌓기 디자이너에게 디자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적 재산권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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