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꿈꾸는 카다피 차남, 분열이 퇴행을 부릅니다 [이상언의 '더 모닝']

중앙일보

입력 2021.08.03 08:18

업데이트 2021.08.03 08:27

 안녕하세요? 오늘은 독재자의 아들이 다시 권력을 노리고 있는 리비아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위 사진 속 배수관은 시민군에게 쫓기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몸을 숨겼던 곳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발각돼 시민군 병사에 의해 사살됐습니다. 10년 전인 2011년 10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수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이 저입니다. 리비아 내전 취재 중에 카다피 사망 소식을 듣고 시르테의 현장으로 갔을 때의 모습입니다.

‘42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독재자의 마지막 은신처였던 배수관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황량한 들판을 지나는 도로 아래에 놓인, 길이 약 10m의 땅굴과 같은 것이었다. 연명을 위해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던 그는 시민군 병사에게 발각되자 목숨을 구걸하며 기어 나왔다. (중략) 시민들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시민들은 “그가 일찍 죽은 게 리비아 재건에 도움이 된다” “나라도 그 자리에서 죽였을 것이다” 등의 말을 했다.’ 당시 제가 쓴 기사의 일부입니다. 위 사진은 그 기사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 ‘리비아 재건’은 1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시민군이 카다피 세력을 축출한 뒤에 임시 정부가 들어섰지만, 곧바로 다시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나라가 동서로 쪼개졌습니다. 수도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한 서쪽에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자리를 잡았고, 벵가지와 토브루크가 있는 동쪽에는 비교적 시민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는 정치 세력이 포진했습니다. 양 측에 군벌과 부족들이 얽혀 복잡한 전선을 형성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외세가 개입했습니다. 터키ㆍ카타르 등은 서쪽 리비아를, 러시아ㆍ프랑스 등은 동쪽 리비아를 지원했습니다. 돈과 무기가 흘러갔습니다.

기관총과 박격포가 불을 뿜는 싸움 속에서 수십만 명의 난민이 생겼습니다. 조악한 배를 타고 지중해를 떠돌다 목숨을 잃은 이가 부지기수입니다. 탈출에 성공한 이들은 여러 나라에서 난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산유국인 리비아는 카다피 집권 시절에 이웃의 이집트나 튀니지보다 월등히 잘사는 나라였습니다.

다행히 지난해 가을에 유엔 중재로 휴전이 이뤄졌고, 통합 과도 정부가 꾸려졌습니다. 올해 12월에 총선ㆍ대선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3년 전에도 비슷한 합의가 있었지만 다시 싸움으로 이어졌습니다. 올해 말의 선거도 예정대로 치러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시민군이 목숨 걸고 쟁취하려 했던 ‘해방 리비아’는 여전히 멀리 있습니다.

이 와중에 카다피의 둘째 아들인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가 대선 도전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카다피 통치 시절에 권력 서열 2위였습니다.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된 상태였습니다. 2011년 ‘아랍의 봄’ 때 민주화 시위에 나선 시민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앞장섰던, 유혈 사태의 책임자입니다. 그는 시민군을 피해 다니다 그해 11월에 사막에서 붙잡혔고, 동쪽 리비아 정부에 의해 구금돼 있다가 2017년 6월에 사면으로 풀려났습니다.

사이프는 카다피 추종 세력을 규합해 힘을 키우고 있습니다. 나라의 분열과 혼란이 “차라리 카다피 시절이 좋았다”는 향수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이프는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재기를 꿈꿉니다.

리비아에서 보듯 국가의 분열은 국민을 도탄에 빠트립니다. 알량한 신념 또는 자신과 주변 사람의 이익을 위해 '함께 할 내 편'과 '타도할 네 편'으로 국민을 갈라 적개심을 부추기는 것은 죄악입니다. 대립과 혼란의 악순환은 독재 세력의 부활이나 권력욕에 사로잡힌 선동가의 등장과 같은 정치적 퇴행을 낳습니다.

한국의 다음 대통령은 꼭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인물이길  바랍니다. 위 따옴표 안에 든 네 단어의 표현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가 최근 뉴욕타임스(NYT) 기자를 만났습니다. 그 내용을 전하는 기사를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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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실종, 카다피 차남 살아있다
 꼭 10년 전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49)는 모든 걸 잃었다. 리비아의 독재자였던 아버지 무아마르 카다피가 반군에 암살된 이후 물려받을 것으로 당연시됐던 권좌는 물론 도주하다 생포되는 과정에서 손가락 두 개도 잃었다. 이후 10년, 그의 행방은 물론 생존 여부도 불투명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의 중동 전문기자 출신 로버트 워스가 그를 추적하기 전까지는.

사이프 카다피가 워스와의 인터뷰에서 침묵을 깼다. 약 6만2000자에 달하는 장문의 인터뷰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NYT 매거진 톱기사로 게재됐다. ‘카다피의 아들이 살아있다. 그는 리비아의 대통령을 꿈꾼다’는 제목을 달고서다. NYT의 레바논 베이루트지국장을 지내고 평생을 중동 취재에 바친 워스는 사이프 카다피 인터뷰를 위해 지난 2년 6개월간 공을 들였다.

아랍어로 ‘이슬람의 칼’을 의미하는 사이프 카다피는 차남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장남은 아니지만 후계자로 낙점됐다는 점 때문에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아버지 카다피는 생전 북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를 이은 친분을 과시했다.

사이프는 영국 명문 런던정경대(LSE)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며 국제 감각을 갖췄다. NYT는 “완벽한 영어와 민주주의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이프는 한때 국제 사회의 희망이었다. 리비아를 점진적으로 혁신할 인물로 받아들여졌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리비아의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는 데 앞장서며 기대를 저버렸다. 이후 반군에 생포된 그는 푸른 수의 차림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재판정에 섰다.

10년 뒤, 상황은 변했다. 그는 풀려났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거처는 확실치 않다. 인터뷰 상황을 워스는 이렇게 전했다. “(승용차에 우리를 태운 이후) 어느 방으로 안내됐는데 불쑥 누군가가 악수를 청했다. 엄지와 검지가 없었다. 사이프 카다피였다. 그는 우리를 거실로 안내했고 (리비아 국기 색이기도 한) 녹색 빛 의자에 앉게 했다. 두꺼운 양탄자와 커튼, 크리스탈 샹들리에로 둘러싸인 방은 화려했고, 치장하는 데 돈이 꽤 들었을 것 같았다. 사이프 역시 금술이 달린 화려한 옷 차림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워스가 “여전히 죄수 신분이냐”고 묻자 사이프는 “아니, 난 자유의 몸”이라며 “정치권으로 컴백을 도모하고 있는 중”이라고 답했다.

카다피 가(家) 몰락 이후 리비아엔 새 시대가 찾아왔지만, 국민은 여전히 궁핍하다. 사이프 카다피가 정치 컴백을 꿈꿀 수 있는 것도 리비아가 현재 처한 어려움 때문이다. 그는 워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반군은 나라를 강간한 것과 마찬가지야. 무릎을 꿇렸고, 돈도 이젠 없고 안전보장도 안 돼 있지. 삶이라는 게 없어. 주유소에 가보게. 넣을 기름이 없어. 우린 산유국이고 이탈리아에 수출까지 하는데 말이지. 이건 재앙 수준이야.”

하지만 워스는 “카다피가 컴백을 꿈꿀 수 있는 건 그가 그동안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그의 존재가 잊혀졌던 덕분에 그나마 재기를 꿈꿀 수 있는 것이며 리비아 국민이 그를 다시 권력자로 인정할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사이프 카다피 역시 이 점을 알아서일까. 대선 출마를 직접 시사하지는 않았다. 워스는 “리비아 안팎에선 그가 대선에 출마할 것이란 예상도 나오지만 정작 그는 말을 아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국가를 다시 통합할 수 있으리라고 강조했다”고 적었다. 리비아의 대선과 총선은 올해 12월로 잡혀 있다.

사이프에 대해 워스는 “독재자 아버지를 보며 성장한 사이프는 서구 중심 국제 사회와도 잘 지내야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유학도 했다”면서도 “그러나 한 가지 바뀌지 않는 사실은 그는 카다피 가의 일원이라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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