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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남북 통신선 복원이란 '희망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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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북 통신선이 복원된 지난달 27일 오후 군 관계자가 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이용해 북한과 통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북 통신선이 복원된 지난달 27일 오후 군 관계자가 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이용해 북한과 통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7일 꽉 막혔던 남북 간 통신선이 13개월 만에 복원되자 곳곳에서 야단이다. 남북 교류 회복은 물론, 내친김에 정상회담까지 가자며 잔뜩 기대하는 이들이 적잖다. 그러나 로마 시인 호르티우스가 노래했듯, 제비 한 마리로 봄이 오진 않는다. 이제 겨우 전화선 하나 이었을 뿐이다. 의미 있는 교류까지는 숱한 변수에 곳곳이 지뢰밭이다.

쌀 지원 노리고 재연결했을 가능성 #도와주되 다른 현안과 연계 바람직 #정상회담보다 구체적 실리 챙겨야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이번 통신선 복원 뒤에는 북한의 노림수가 숨어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간 북한은 대북 인권결의안, 천안함 사건에 따른 5·24 조치 등 온갖 구실로 통신선을 갑자기 끊었다 아쉬우면 복원하곤 했다.
 느닷없는 통신선 복원은 2000년 이래 다섯 번. 한 번을 빼곤 물질적 필요에 따라 통신선 단절과 복원을 거듭했다.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던 2000년과 2011년에는 한국과 미국 측 쌀 지원이, 2009년과 2013년에는 각각 개성공단 임금 인상 및 재가동이 목적이었다. 2018년 초에 이뤄진 통신선 복원만 북한 대표단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위한 조치였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다. 북한은 이번에도 청구서를 내밀 게 뻔하다. 북한과의 교류에 목말라하는 현 정권이다. 웬만한 요구라면 다 들어줄 기세다. 그렇다면 북한은 뭘 바랄까. 우선은 이달 중순으로 잡힌 한·미 연합훈련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의 중단이다. 김정은 정권의 대변인 격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이미 지난 1일 "남조선 측이 적대적 전쟁 연습을 벌일지, 아니면 큰 용단을 내릴지 예의주시할 것"이라며 UFG 중단을 요구했다. 국방부 측에서는 훈련 강행을 주장하나 통일부를 중심으로 한 남북교류파는 코로나를 이유로 연기를 주장한다. 갈수록 연기, 또는 대폭 축소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2020년 8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심각한 홍수 피해를 입은 황해북도 은파군 일대를 방문해 피해 상황을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2020년 8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심각한 홍수 피해를 입은 황해북도 은파군 일대를 방문해 피해 상황을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주목할 건 북한의 요구가 군사훈련 연기로 끝나지 않을 거란 사실이다. 지난해 북한 경제성장률은 -4.5%. 23년 만의 최악이다. 올해 들어서는 경제 제재, 코로나, 수해라는 삼중고로 식량난이 더 극심해졌다. 지난달 중순 북한이 이례적으로 "곡물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으며 백신 등 필수 의약품도 부족하다"는 보고서를 유엔에 낸 게 그 증거다. 1990년대 말 수십만 명이 굶어죽어도 아쉬운 소리를 안 했던 북한이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김정은 자신이 서너 번이나 경제정책 실패와 주민들의 생활고를 언급했다. 이 때문에 2000년, 2011년에 그랬듯 이번에도 북한이 식량 지원을 바라며 통신선을 복원했을 거라고 보는 시각이 대다수다.
 어떤 대북 강경론자라도 죄 없는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길 바라진 않을 거다. 북한이 쌀 지원을 요청해 오면 인도주의 차원에서 도와주는 것이 옳다. 다만 명심할 사실은 쌀 지원 카드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 1995년 6월 사상 처음으로 북한에 줄 식량을 실은 수송선을 남쪽 주민들이 환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995년 6월 사상 처음으로 북한에 줄 식량을 실은 수송선을 남쪽 주민들이 환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거 김대중 정부는 대북 쌀 지원을 이산가족 상봉과 연계해 협상했다. 그 결과 쌀을 주는 대신 남북 이산가족들을 15년 만에 다시 만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에 김영삼 정부는 일본이 대북 지원을 고려하자 선수를 안 빼앗기겠다며 식량 지원을 서두르다 스타일만 구겼다. 제대로 사전 협상을 못하는 바람에 쌀 수송선이 인공기를 달고 가야 했다. 결국 국내 여론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남북관계는 좋아지기는커녕 도리어 악화했다. 대북 쌀 지원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득(得)도, 독(毒)도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는 북한이 쌀 대신 백신을 원할 거란 분석도 있다.
 가장 걱정되는 대목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 술수에 넘어가 귀중한 쌀 또는 백신 지원 카드를 헛되이 날려버릴지 모른다는 거다. 북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내년 베이징 올림픽 때 만나주겠다는 김정은의 '희망 고문' 전략에 넘어가 별 대가 없이 쌀 또는 백신 퍼주기를 할 위험도 있다. 정권 말의 실속 없는 보여주기식 남북 정상회담보다는 차라리 이산가족 상봉 같은 실속 있는 사안과 맞바꾸는 게 백번 현명하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