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예측 불가능한 공 던지기

중앙일보

입력 2021.08.03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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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차세현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최근 10승을 달성한 토론토 블루제이스 투수 류현진의 직구 구속은 메이저리그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140㎞ 중반대다. 구속만으론 리그 하위권이다. 그런 류현진의 경쟁력은 똑같은 투구폼으로 포심, 투심, 컷패스트볼에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브 등 6가지 종류의 공을 자유자재로 던진다는 점이다. 내로라하는 메이저리그 타자들도 류현진이 어떤 공을 던질지 예측하기 쉽지 않다. 타자들로선 사인이라도 훔치고 싶을 정도로 영리한 팔색조 투구를 한다.

정권말 ‘묻지마’ 정상회담 추진
북, 청구서 내밀며 조커로 활용
동맹 미국은 우려의 눈길 보내
비핵화 성과없는 추진 중단해야

그런데 사인 훔치기가 필요 없는 한국의 정책이 있다. 북한도 알고, 미국도 알고, 중국도, 일본도 다 아는 정책, 5년 차 민주당 정부의 남북 정상회담 추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 신년 기자회견에서 집권 5년 차라고 해서 남북 정상회담을 서두르진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지난주 남북 정상 간 친서 교환 사실을 공개하면서 북한이 13개월 전 일방적으로 차단했던 통신선을 복원하자 또 한 번 5년 차 정상회담 개최설에 불이 붙었다.

문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지금 남북은 밥 한번 하자고 한 정도인데 숭늉을 달라는 것은 좀 급한 것”이라고 했지만, 많은 이들은 청와대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고 싶은 마음이란 걸 이미 알고 있다.

사실 올해 정부의 남북 정상회담 추진 노력은 집요했다.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미 정상회담,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한 첫 화상 정상회담에 이어 대선 한 달 전인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 남·북·중 정상회담 개최까지 정말 정상회담 개최방식만 놓고 보면 끝판왕이라고 할 정도다.

물론 2년 넘게 꽉 막힌 북미 비핵화 협상과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모멘텀을 마련하는 일은 임기 5년 차라도 게을리해선 안 될 일이다. 다음 정부를 위해서도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타자들이 류현진의 다음 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정부의 속내를 뻔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에 서명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에 서명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북한은 통신선 복원 닷새 만에 예상대로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8월 중순 예정된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했다. 훈련을 예정대로 하면 제4차 정상회담은 꿈도 꾸지 말라는 엄포까지 놓았다.

북한은 노무현 정부 5년 차인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의 추억을 되새기며 슬슬 홈런 세리머니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대북 제재에 코로나19,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 정권엔 조커도 이런 조커가 따로 없다. 이런 상황에 정부가 대한민국 재산인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것이나 대한민국 국민을 서해 상에서 사살 소각한 만행에 대해 사과를 요구할 수 있을까.

미국은 남북대화 지지 입장을 냈지만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이미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가 없는 한 대북 제재를 유지하는 것이 북한의 도발 의지와 협상력을 약화시켜 비핵화를 앞당기는 최선의 길이라고 전 세계를 향해 공개 선언했다.

그런데 동맹인 한국만 유독 북한이 원하는 제재 완화와 한미 연합훈련 연기·축소 카드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최근 사례는 지난달 말 김기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의 워싱턴특파원 간담회 발언인데, 김 원장은 “(한미 연합훈련 때까지) 아무런 조치 없이 2주를 넘기면 북한은 우리가 예상 못 한 방식으로 도발하고 통신선 복원과 친서 교환 등은 다 소용없이 경색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다. 그나마 미국은 동맹인 한국을 배려해 담장 밖으로 공을 날려 보내는 대신 “한국도 미국과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다”(조셉 윤 전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고 점잖게 조언할 뿐이다.

지난 4년간 최악의 한·일 관계를 경험한 일본은 아예 싸늘하다. 일본은 문 대통령의 도쿄올림픽 참석과 톱다운식 한·일 관계 개선 결단을 거부했다. 한국의 갑작스러운 유화적 태도가 미국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제스추어이자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만남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과를 내야 한다”고 했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런데 북한이 원하는 것을 ‘맞춰주는’ 성과가 아니라 실질적인 비핵화와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맞춰내는’ 성과여야 한다. 맞춰줄 바엔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낫다.

민주당은 정권 교체 탓이라고 하지만, 국민은 2007년 대선 두 달 전 남북 정상이 서명한 10·4 공동선언에 담긴 수많은 약속의 현주소를 잘 알고 있다. 류현진처럼 예측불가능한 공을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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