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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호정의 왜 음악인가

145년만의 여성 지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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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호정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호정 문화팀 기자

김호정 문화팀 기자

한 마을의 소녀들이 둘러앉아 함께 일하며 노래한다. “돌아라 돌아라, 훌륭한 물레야.” 이 노동에 한 여성이 참가하지 않는다. 노래의 곡조도 영 다르다. “배 한 척이 바다를 헤치며 가네!” 유모는 나무란다. “물레도 안 돌리고 저렇게 게을러서야!”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여주인공 젠타다. 뱃사람인 네덜란드인은 바다에 대한 오만함으로 내내 거기에 떠있는 저주를 얻는다. 해결책은 언제나처럼 사랑이다. 젠타는 물레를 돌리는 대신 네덜란드인의 전설에 매혹돼있다. 이렇게 ‘전통적’ 여성상을 벗어난 젠타는 바다에 몸을 던지는 숭고한 희생으로 네덜란드인을 구원한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독일 바이에른 주의 바이로이트 오페라 축제가 이 작품을 공연했다. 개막작이었는데, 현재 세계 문화계의 공통되고 외면할 수 없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여성’이다. 우선 지휘자가 여성이었다. 우크라이나 태생의 옥사나 리니프(43·Oksana Lyniv)다. 바이로이트 축제가 시작된 1876년 이후 처음, 즉 145년만에 지휘봉을 잡은 여성이다.

바이로이트 축제에 데뷔한 옥사나 리니프. [연합뉴스]

바이로이트 축제에 데뷔한 옥사나 리니프. [연합뉴스]

바그너 오페라의 여성관은 단순하지 않다. 전투적으로 싸우고, 인류를 구원하며, 거룩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남성 위주 세계의 일들이라 논쟁적이다. 하지만 여성 지휘자의 시선은 비교적 명확했다. 리니프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바그너는 젠타로 현대 여성의 전형을 창조했다”고 분석했다. “젠타는 아버지가 원하는대로 결혼하지 않고, 자신만의 생각이 있었다. 19세기에는 이례적이었다.” 이날 무대에서 젠타를 맡은 소프라노 아스믹 그리고리안은 가수 빌리 아일리시 스타일의 머리로 등장해 해방된 캐릭터를 표현하면서 길고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바이로이트의 청중은 대체로 바그너 매니어이며 냉정하다. 이날 연출가 드미트리 체르니아코프에게도 급진적 설정을 이유로 노골적 야유를 선사했다. 하지만 리니프는 과감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만들고서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바이로이트가 여성 지휘자를 너무 늦게 불렀다는 증명이었다.

바이로이트는 정말로 늦었다. 시모네 영(60) 같은 여성 지휘자는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 전체를 녹음했고, 바이로이트 공연작인 10개 오페라도 완주했지만 바이로이트에는 초청받지 못했다. 물론 성별이 전부는 아니다. 리니프도 베를리너 자이퉁 인터뷰에서 “지휘자 성별엔 언론만 관심있다. 실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언론도 이제는 바이로이트 지휘자에 ‘여성’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 성별에 관계없이 실력으로 이야기해도 되는 판이 됐다. 오페라 애호가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날 공연에서 내뱉었다는 한마디처럼.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