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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올림픽 흥행에 대한민국만 딴 세상?…젠더갈등 속 올림픽 두 얼굴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3일 오후 일본 도쿄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영원한 유산'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A

지난달 23일 오후 일본 도쿄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영원한 유산'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A

“선수의 외모나 복장, 신체 부위를 불필요하게 강조해선 안 된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보완한 ‘묘사 가이드라인’에 담긴 일부 내용이다. 그간 중계방송을 통해 여성 선수들의 활약보단 이들에 대한 성차별적인 장면 묘사가 더 강조되자 IOC가 ‘성평등과 공정성’을 위해 내놓은 대책이었다. 이처럼 ‘성평등 올림픽’을 위한 노력이 한창이지만, 정작 한국에선 도쿄올림픽을 둘러싸고 ‘젠더 갈등’이 다시 불붙는 모양새다.

도쿄올림픽에 관심 집중된 ‘성평등 실현’

이번 도쿄올림픽은 그 어느 때보다 ‘양성평등’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여성 참가 비율은 48.8%로 역대 올림픽 중 가장 높다. 성평등 정신을 강조한 IOC의 방침에 따라 개회식에선 205개 참가팀 모두 남녀 기수가 공동으로 등장했다.

성평등 정신을 강조한 IOC의 방침은 혼성경기 확대에서도 확인된다. 2016 리우올림픽 당시 9개였던 혼성 종목은 2020 도쿄올림픽에서 18개로 크게 늘었다. 양궁을 비롯해 육상과 수영,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유도 등에서도 첫 혼성전이 펼쳐졌다.

양궁 국가대표 김제덕(왼쪽)과 안산 선수가 지난달 24일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혼성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기뻐하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V

양궁 국가대표 김제덕(왼쪽)과 안산 선수가 지난달 24일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혼성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기뻐하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V

도쿄올림픽의 대한민국 첫 금메달이자 올림픽 사상 첫 양궁 3관왕의 기록은 양궁 혼성 단체전에서 나왔다. 이번 올림픽에서 처음 채택된 양궁 혼성 경기에서 양궁 국가대표팀의 막내인 안산(20·광주여대)과 김제덕(17·경북일고)은 함께 호흡을 맞춰 한국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복장 관행 깨고, 성범죄 항의 퍼포먼스도

독일 여자 기계체조 대표팀은 긴 바지를 입고 올림픽에 참가했다. 사진 파울린 쉬퍼 SNS

독일 여자 기계체조 대표팀은 긴 바지를 입고 올림픽에 참가했다. 사진 파울린 쉬퍼 SNS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성평등의 가치를 몸소 보여주며 화제를 모았다. 독일 여자 체조 대표팀은 팔다리가 전부 노출되던 기존의 원피스 수영복 모양인 레오타드 유니폼 대신 하의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유니타드 유니폼을 입고 출전했다.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체조계의 복장 관행을 깨고 여자 체조 선수들을 ‘성적 대상화’로 보는 것을 막는 취지였다.

미국 남자 에페 대표팀은 지난달 30일 열린 팀 단체전에서 선수 4명 중 3명만 분홍색 마스크를 끼고 경기장에 등장했다. 성범죄 혐의를 받는 앨런 하지치가 대표팀에 선발된 것에 대해 팀 동료들이 항의를 표시한 집단행동이었다. 당시 하지치는 유일하게 검은 마스크를 썼다.

성평등 올림픽 와중 한국에선 ‘젠더 갈등’

그러나 ‘성평등 올림픽’이 한창인 가운데 한국에선 올림픽을 바라보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상황이다. 도쿄올림픽 양궁 3관왕인 안 선수의 쇼트커트(short cut) 헤어스타일을 둘러싼 페미니즘 논란이 젠더갈등으로 비화하면서다. 남성 이용자들이 많은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안 선수를 급진 페미니스트로 지칭하며 “금메달을 박탈해야 한다”는 비방글이 올라오자 SNS에선 여성들이 쇼트커트를 한 인증샷을 올리며 안 선수 응원에 나섰다.

이러한 올림픽 젠더 갈등은 정치권까지 번졌다. 양준우 국민의힘 대변인이 페미니즘 논란에 휩싸인 안 선수에 대해 지난달 30일 “남혐(남성 혐오) 단어를 사용했다”고 밝힌 것이 발단이 됐다. 안 선수가 과거 SNS에 ‘웅앵웅’ ‘오조오억’과 같은 단어를 쓴 것을 겨냥해 양 대변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안 선수가 남혐 단어로 지목된 여러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 드러났다”며 “이번 논란의 핵심은 ‘남혐 용어 사용’, 레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양 대변인의 이번 사건에 대한 인식이 아주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장 의원은 “성차별적 낙인 휘두르기 자체를 아예 허구로 규정하고, 안산 선수가 ‘남혐 단어’를 써서 그렇다며 폭력의 원인을 선수에게 돌리고 있다”며 “이번 사건의 핵심은 청년 여성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가해진 페미니즘을 빌미 삼은 온라인 폭력”이라고 적었다.

이후에도 양 대변인은 “남혐 용어로 ‘지목된’ 여러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고 한 것이지, 진짜 혐오 단어라고 단정 짓지 않았다”고 반박했고, 장 의원은 “공당의 대변인이 부끄러움 없이 버젓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 사퇴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하며 공방을 벌였다. 논쟁이 격화하자 2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양 대변인이 만약에 여성혐오라고 하는 개념을 조금이라도 본인이 썼거나 부적절한 인식을 갖고 있다면 제가 징계하겠다”며 “양 대변인은 여성혐오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한 적이 전혀 없다”고 말하며 정의당의 사퇴 요구에 선을 그었다.

“성평등 감수성 국제 기준보다 못한 현실”  

전문가들은 올림픽이 보여줄 수 있는 성평등의 가치를 강조하는 한편, 이러한 올림픽이 젠더 갈등으로 소비되는 현실에 우려를 표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부 남초 사이트에서 발단이 된 젠더 갈등을 정치권이 그대로 이어받으며 논란을 확산시키고 있다”며 “성공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스포츠가 주는 성평등의 사회적 가치가 혐오 감정 속에서 퇴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소정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올림픽이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받는 국제적인 행사인 만큼 성평등 올림픽의 모습은 성평등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면서 “안 선수를 둘러싼 지금의 젠더갈등은 우리나라의 성평등 감수성과 담론이 국제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올림픽만큼도 못 따라가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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