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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평소 나이스한 그 남자, 랜선 너머에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손민원의 성인권이야기(49) 

미디어가 없는 세상을 하루도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1994년 미국 잡지 뉴요커에는 ‘인터넷에서는 당신이 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라는 글과 함께 컴퓨터 앞에 앉은 개 그림이 등장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여성인 척하는 남성이 되기도 하고, 남성인 척하는 여성이 되기도 한다. 나이가 어린 척 행동하기도 하고, 직업을 속이기도 한다.

지난해 N번방 사건에서 나타났듯이 익명성의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의 존재를 바꿔가며 어린 청소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이 사건 이후 많은 사람은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느껴 강력히 대응할 것을 요구했고, 불법 촬영물을 시청하는 것만으로도 처벌될 수 있게 됐다(성폭력범죄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그러나 경찰이 인지하는 불법 촬영 관련 사건이 하루에도 16건을 넘는다고 하니 법을 무색하게 하는 범죄는 오늘도 진행형이다.

디지털 성범죄를 당한 사람의 가장 공통적인 피해는 불안증이다. 언제 어디서 나의 불법 촬영된 영상을 누군가가 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pixabay]

디지털 성범죄를 당한 사람의 가장 공통적인 피해는 불안증이다. 언제 어디서 나의 불법 촬영된 영상을 누군가가 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pixabay]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가 얼마나 많았으면 최근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는 한국 사회만이 갖고 있는 특이한 불법 촬영 문제의 심각성을 보고서를 통해 지적했을까.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가 그 보고서 제목이다. 휴먼라이츠워치의 보고서 담당자는 인터뷰를 통해 “공중 화장실이나 여자 탈의실 불법 촬영이 유행하는 곳은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며 한국 성범죄의 심각성을 말한다.

누구나 원하는 스타일의 초소형 카메라를 인터넷에서 살 수 있다. 한 직장인은 직장상사가 선물로 준 탁상시계를 한 달 넘게 사용하던 중 그 안에 카메라가 설치된 것을 발견했다. 또 어떤 사람은 십년지기인 친구 집에 놀러 가 샤워를 하러 욕실에 갔는데 화장실 선반에서 자동차 키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이 키는 초소형 카메라와 메모리가 내장된 촬영장비였다. 이 친구의 아버지가 설치한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촬영된 영상은 와이파이를 통해 실시간으로 가해자의 목적에 맞게 사용된다.

디지털 성범죄를 당한 사람의 가장 공통적인 피해는 불안증이다. 언제 어디서 나의 불법 촬영된 영상을 누군가가 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촬영되지 않은 사람은 맘이 편한가? 나는 불법 촬영물이 어느 화장실에서 발견됐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혹시 어딘가에 내 촬영물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 대부분의 여성이 갖고 있는 공포다. 이런 피해자의 가장 큰 상처는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밥 먹고 떠들던 동료 혹은 선후배가 나를 성적 대상으로 여겼다는 배신감일 것이다. 평상시엔 그리도 나이스한 사람이 랜선 너머의 상대를 동료가 아닌 성적 대상의 여자로 볼 수 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위 왓치 유’, ‘#우리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최근 체코에서 제작한 디지털 성범죄를 다룬 다큐 영화다. N번방 사건에서 미성년 피해자가 특히 많았는데, 이 영화를 보면 가해자가 미성년에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 성범죄를 일으키는지 잘 드러난다.

이 영화는 3명의 성인 배우를 열두 살의 나이로 분장케 하고, 열두 살 여성의 프로필로 페이크 계정을 만들어 채팅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실험한다. 3개의 세트장을 평범한 어린이 방으로 꾸미고 영상 채팅을 한다. 채팅을 시작하자마자 쉴 새 없이 채팅방에 접촉하고자 하는 벨이 울려댄다. 채팅을 시작하고 두 시간이 지났을 때는 이미 83명의 남성이 대화를 시도했다. 그런 방식으로 10일 동안 진행된 실험에서 채팅방에 접속한 사람은 모두 2458명이었다.

열두 살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이 계정을 찾은 2458명이 채팅하고자 한 목적은 무엇일까? 다큐에서는 오로지 한 명의 대학생을 제외한 모든 접속자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더 어리고 순진하며 착한 아동 청소년을 성적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 모두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면서 자위행위를 하고, 집요하게 서로 옷을 벗고 대화할 것을 요구한다. 나체 사진을 요구하기도 하고,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실제의 만남을 제안한다. 폰 뒤에 있는 사람은 더럽고 추악한 악마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국의 현실과 너무 유사해 울분을 가라앉히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그루밍’을 시도한다. ‘그루밍’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드는 등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뜻한다. ‘그루밍’ 은  많은 경우 어린이나 청소년 등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다. 사춘기 아이는 부모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고, 학업 스트레스는 많아지며, 또 학교에서 응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심리적 불안이나 고민을 이야기할 대상을 구한다. 스마트폰이 익숙한 10대는 그 상대를 온라인 공간에서 찾는다. 온라인 세상에서 어슬렁어슬렁 먹잇감을 물색하는 가해자는 그물망에 포착된 청소년에게 추악하고 더러운 목적을 숨긴 채 처음에는 친절하고 선한 모습으로 접근한다. 이들은 하루, 이틀, 일주일, 길게는 한두 달 동안 SNS를 매개로 대화한다. 더구나 그 사람은 그루밍 대상이 필요한 음식과 상품권을 제공하기도 한다. 신뢰를 쌓으면서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알게 된다. 취약한 청소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심리적 결박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루밍 덫에 걸려든 청소년에게 만남을 요구하고, 요구에 순응하지 않았을 때 개인정보는 협박의 빌미가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포르노 영상을 처음 접하는 나이는 대략 초등 2~3학년 정도라는 통계가 있고, 그 연령은 점점 더 내려간다. 특히 코로나19 상황에서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이뤄지고, 스마트폰과 인터넷 접속 시간은 자연스럽게 더 늘어났다. 아이들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은 교육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많은 시간을 돌봄으로부터 소외된 아동 청소년일수록 영화 속 먹잇감을 찾는 사냥꾼의 레이더에 잘 포착된다. 이것 또한 사회적 격차로 인해 벌어지는 차별의 단면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이뤄지고, 인터넷 접속 시간은 자연스럽게 더 늘어났다. 아이들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은 교육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와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사진 pixnio]

코로나19 상황에서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이뤄지고, 인터넷 접속 시간은 자연스럽게 더 늘어났다. 아이들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은 교육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와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사진 pixnio]

왜 유독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를 계획하고 불법 카메라를 구입하며, 나아가 이를 시청·유통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불법 촬영물의 소지·시청에 종신형에 가까운 강력한 법안이 나오지 않아서일까, 처벌에 비해 불법 촬영물이 돈이 되는 시장이 커서인가? 실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은 평생을 불안과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가고, 또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심각한 피해를 보지만 많은 경우 벌금형이나 수강명령으로 처리됐었다.

휴먼라이츠워치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기술 발전에 비해 성평등 인식이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불법 촬영물을 소비하는 것을 별일이 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 정부를 향해 “디지털 성범죄가 생존자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이해가 결여돼 있다”며 위원회를 구성하고 모든 유관 기관에서 이 문제를 우선 과제로 책정해 다룰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에도 수많은 기회를 놓쳤다. 소라넷, 웹하드, 웰컴투 비디오, N번방 사건…. 반복되는 사건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여성은 성 상품화돼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지만 결국 무대만 다르지 같은 사건의 무한 반복이다.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휴먼라이츠워치가 말하는 ‘성평등’해져야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군대에 가는 것인가? 그에 앞서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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