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성장의 문화와 혁신 친화적 제도 없으면 발전 멈춘다

중앙일보

입력 2021.08.02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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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선진국과 후진국 가른 비결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2년 전 브라질의 한 도시에서 기술혁신 전문가들이 모인 국제 콘퍼런스가 개최되었다. 주최 측의 요청대로 한국의 산업발전 과정과 현재의 고민에 대해 발표를 마치고 났을 때 장관을 역임하고 세계은행 부총재까지 지낸 브라질의 저명인사가 손을 들었다. 그는 내 발표내용에 덧붙여 그만의 시각으로 한국의 성장비결을 다시 요약한 후 강연장을 가득 메운 브라질 젊은이들을 향해 한국을 배워 브라질에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노 학자의 조국을 위한 간절한 호소에 가슴이 뭉클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심 과연 밖에서 보는 시각만큼 한국 산업이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19세기 중국의 몰락, 과거지향 탓
한국, 선진국 진입한 예외적 국가
성장의 문화엔 리더 역할 절대적
대선주자들, 치열한 토론 필요해

브라질과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 추이를 보면 1980년대 이후 마치 나뭇가지가 분기하듯 그래프가 아래위로 크게 나누어진다. 아래 그래프에 있는 국가 입장에서는 부럽고 안타까운 일임이 틀림없다. 어떻게든 그 원인을 알고 격차를 줄이겠다는 고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역사적으로 이보다 더 큰 대규모의 분기가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즉 1820년 시점에 나타났다. 서구와 비(非) 서구 국가간에 소득과 삶의 질의 차이가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시점인데, 워낙 지구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라 흔히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라고 부른다. 그 당시 윗길을 탔던 나라는 지금도 선진국이고, 아랫길에 있던 나라는 지금도 후진국이거나 기껏해야 개발도상국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달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태극기를 비롯한 국기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유엔무역 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연합뉴스]

지난달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태극기를 비롯한 국기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유엔무역 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연합뉴스]

지난달 유엔무역개발회의(UN CTAD)가 설립 이후 처음으로 한국의 지위를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했다는 뉴스가 회자했다. UNCTAD 분류에서 선진국으로 분류되어 있는 나라는 낯선 소국들을 제외하면 영국·프랑스·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인데, 1820년 대분기 때 이미 선진국이었던 나라들이다. 그때 선진국이 아니었던 나라 가운데 선진국으로 분류된 나라는 단 한 곳, 일본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이 일본에 이어 둘째로 그 높디높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장벽을 뛰어넘었다. 2차 대전 이후 경제발전을 시작한 나라 가운데는 한국이 유일하다.

서구 선진국과 그 외 개도국이 나누어진 대분기의 원인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대체로 제도적 차이 때문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 사유재산권의 보호를 포함한 자본주의 제도와 민주주의 시스템이 도입된 국가들이 선진국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설명도 완전하지 못하다. 중국의 최근 발전상에서 보듯 억압적 시장제도하에서도 성장이 이루어진 사례들이 있다. 인도처럼 외형적으로 민주주의 시스템을 완벽히 갖추었으나 발전하지 못한 곳도 있다.

그렇다면 대분기를 만든 결정적 원인은 무엇일까. 겉으로 드러난 제도 이면에 있는 미래지향적 문화가 핵심이다. 대분기의 기초가 된 17세기 과학혁명의 역사가 잘 말해준다. 튀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을 거쳐 이루어진 천문학의 혁명과 만유인력의 발견은 고대 사람들의 이야기와 다른 방식의 세계관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15세기부터 시작된 대항해시대에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들도 쏟아졌다. 이 새로운 사실들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동안 진리라고 믿었던 고대 성인들의 책과 경전 속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향후에도 계속 새로운 발견들이 이루어진다면 현재의 지식경계가 미래를 향해 계속 넓어질 것이라는 진보적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 선대가 아니라 후대가 더 중요하다는 사고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사실 1800년대 초반까지도 뉴턴의 과학이 실제 산업에 활용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뉴턴의 진정한 기여는 근대 산업의 과학적 기초를 놓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의 이야기를 신성시하는 과거지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미래로 도전해나가는 것이 더 가치롭다는 미래지향적 패러다임을 사회에 심어준 것이다.

과학혁명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면서 대분기가 시작되었는데, 그 이면에는 이 미래지향적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새로운 증거를 바탕으로 오늘의 지식을 쌓아나가는 과학적 합리주의, 외부환경에 적응해나가는 개방적 태도, 도전적인 기업가에 대한 사회적 존경, 그리고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문화가 핵심이다. 경제사학자 조엘 모키어는 이를 종합하여 한마디로 ‘성장의 문화’라고 요약했다.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뛰어오른 한국의 성장곡선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뛰어오른 한국의 성장곡선

성장의 문화라는 유전자가 혁신활동을 뒷받침하는 제도로 표현된 것이 현대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다. 자본의 축적과 재투자를 진작하는 기업제도, 혁신활동을 뒷받침하는 금융시장제도, 산업생태계의 창조적 파괴를 촉진하는 시장경쟁제도, 지식활동을 장려하는 특허제도, 사회적으로 지식을 축적하고 전수하는 인재육성제도, 다양한 아이디어의 원천에 접하도록 자극하는 개방적 무역제도 등이 그 예다.

대분기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언급되는 반대의 예가 19세기 중국의 몰락이다. 중국은 화약과 종이·나침반이라는 중요한 발명의 원천이었지만, 성장의 문화를 갖추지 못해 대분기의 아랫길을 걸어갔다. 15세기 명나라 때 아프리카까지 이르렀던 정화의 대원정(1405~1433)에서 알 수 있듯 한때 놀라운 탐험정신과 개방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후 정치적인 이유로 200년 이상 바다로 나가는 것 자체를 금하는 해금(海禁)정책을 펴면서 닫힌 국가가 되었다. 과거의 경전을 끊임없이 암기하도록 강요하는 교육과 과거제도는 지도층의 생각을 과거지향에 묶어 놓았다. 불행하게도 세계적으로 대분기의 싹이 돋아나던 당시 우리나라도 해금정책으로 세계와 통하는 문을 닫아걸었다. 지도층은 오래전 수입된 경전을 교조적으로 암송하면서 성현의 말씀을 누가 더 잘 해석하는가에 명운을 걸었고, 과학기술적 탐구와 신산업 개척 등 미래지향적 혁신활동에 대한 제도적 인센티브는 극도로 축소되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처음으로 대분기 시대 갈라졌던 아랫길을 벗어나 선진국에 진입한 예외적인 국가가 되었다. 80년대 이후 한국과 브라질의 분기를 두고 브라질 노학자가 쏟아낸 안타까운 목소리는 성장의 문화가 지금도 유효하게 작동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열정적인 목소리로 한국에는 있었지만 브라질에 없었던 것으로 ▶해외시장에 열려있는 개방성 ▶신산업에 대한 도전의식 ▶인재육성을 위한 지속적인 투자 ▶기업가 정신의 존중으로 꼽았다. 모두 대분기의 윗길을 탔던 나라들이 공통으로 가졌던 성장의 문화와 이에 기반한 제도들이었다.

성장의 문화는 대분기 시대 유럽에서 형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류 전체가 집단적으로 발견한 성장의 비법이다. 어느 국가라도 이런 문화와 제도를 가지고 있으면 성장할 수 있다. 한국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성장의 문화와 이를 구체화한 제도는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다. 운동하지 않으면 근육이 사라지듯이 가꾸지 않으면 쇠퇴한다.

성장의 문화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는 그 사회 리더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16세기 말 프랑스 국왕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지식인과 기술자 집단이던 위그노들을 탄압했고, 40만 명의 기술자들이 국외로 탈출했다. 반면 당시 영국의 국왕은 특별이민법을 제정해 위그노 기술자들을 모셔왔다. 이러한 리더의 생각 차이가 산업혁명의 선발자와 후발자를 만들어냈다.

국가의 리더를 뽑는 대통령 선거 계절이 시작됐다. 개헌이 없는 한 앞으로도 5년마다 겪을 일이다. 이 중차대한 시기에 리더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성장의 문화를 어떻게 진작시킬지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불신과 음모론이 가득한 시대, 과학적 합리주의를 어떻게 더 진작할지, 더 개방적 국가체제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도전의식으로 가득 찬 혁신적 인재를 어떻게 키워나갈지, 신산업은 어떻게 만들어나갈지, 사라지는 산업과 일자리 위기에 놓은 사람들을 어떻게 새로운 영역으로 성공적으로 안착시켜나갈지, 기업가 정신은 어떻게 진작시켜나갈지 등 미래지향적 주제들이 핵심 의제가 되기를 바란다.

과거 대분기의 역사와 현재 브라질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미래지향적 성장의 문화와 이에 기반한 혁신친화적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국가의 성장은 언제라도 멈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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