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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은수의 퍼스펙티브

국민 행사가 된 여름 휴가의 씁쓸한 풍경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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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퍼스펙티브 8/2

퍼스펙티브 8/2

무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땀에 옷이 흠뻑 젖을 정도다. 지난 주말 버티지 못하고 에어컨을 돌렸다. 위화의 표현처럼 “낮잠 자다 일어났는데 땀이 흘러 피부를 하얗게 불려 놓을 정도”라 어쩔 수 없었다. 휴가 여행을 가고 싶으나 코로나19 탓에 떠나지 못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경제 성장으로 낯선 곳에 머무는 휴가 여행 일반화했지만 #올해는 코로나 탓에 국내 여행 가기도 조심스러운 상황 #휴가 여행이 고된 노동과 소비 중독 왕복하는 진자로 변해 #무더위에 약자 고통 잊는다면 공동체 소멸 파국 불가피

여름 휴가와 피서는 다르다. 휴가는 근대 시민의 체험이고, 피서는 중세 귀족의 행위다. 황제나 귀족은 강변이나 숲속에 별장을 두고 몇 주 동안 머물면서 단지 더위를 피했다. 노동과 아무런 상관도 없으므로, 이들의 피서는 일하지 않을 자유를 타고난 인간의 유희에 불과했다.

휴가는 노동에서 놓여나는 것이다. 프랑스어 바캉스(vacance)는 휴가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어근 vac-는 라틴어로 ‘비우다, 자유로워지다’를 뜻한다. 일을 비우고 자유를 얻는 것이 휴가다. 귀족과 달리 시민은 투쟁을 통해 게으를 수 있는 권리인 여가권을 얻어내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택배 노동자의 잇따른 죽음에서 드러나듯 일하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역사에서 여름 휴가가 대중화된 것은 1960년대 중반이니, 휴가 여행의 역사는 60년도 채 안 된다.

백성에겐 꿈꾸기 어려웠던 피서

한여름에 시원한 곳을 찾아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복날 풍속의 뿌리는 훨씬 깊다.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따르면 복날에 사람들은 보신탕이나 팥죽으로 더위를 이기고 염병을 물리치려 했다. 무더울 때 양반들은 계곡이나 숲에서 피서를 즐겼다. 벗들과 함께 술 마시고 시 지으면서 탁족을 하거나 뱃놀이를 했다.

특히 솔숲 안 정자에서 벽송음(碧松飮)을 열어 연꽃을 감상하며 벽통주(碧筩酒) 마시는 걸 최고로 쳤다. 벽통주란 연잎을 잔 삼아 술을 부은 후 꽃대에 구멍을 내 빨아 먹는 것이다. 담양 식영정 주인 김성원은 폭염에 벗들을 초대해 밤이 이슥하도록 풍광을 즐겼다. “한 줄기 시내는 골짜기로 통하고/ 천 그루 나무는 정자를 감쌌네./ 매미 울음소리 거울처럼 맑고/ 반딧불은 별처럼 반짝이네.” 그러나 불볕더위에도 농사일에 바빴던 대다수 농민에게는 꿈꾸기 어려운 호사였다.

일제를 거쳐 해방을 맞는 동안, 여름 나들이는 점차 대중화됐다. 제헌절·광복절 등 국경일이 주말과 이어져 1950년대 연휴 개념이 처음 생기자 대도시 중산층은 이름난 해변과 명산 계곡으로 멀리 숙박 여행을 떠나 복날을 기념했다. 야만으로 규탄받는 보신탕 대신 삼계탕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60년대 중반 이후 여름 나들이가 비로소 휴가 여행이 되었다. 폭발적 경제 성장의 영향이 컸다.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에는 66년 봄에 라디오를 멘 시민들이 주말마다 유원지를 떠도는 장면이 나온다.

70년대 연례행사가 된 여름 휴가

5·16쿠데타 이후 군사 독재에 짓눌린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 김수영은 ‘말복’에서 예감했다. “오늘은 말복도 다 아니 갔으며/ 밤에는 물고기가 물 밖으로/ 달빛을 때리러 나온다”.

억눌린 마음을 뜻하는 물고기가 기어이 “달빛을 때리러” 고개를 내밀었다. 시인이 바란 자유는 더 근원적 해방이지만, 여름 휴가라는 한 줄기 숨통이 트이자 700만 명이 일제히 해운대·대천·송도 등에 몰렸다. 해마다 규모가 늘었다. 누구도 예측 못 했던 대규모 반란이자 심정의 폭발이었다. 드디어 여름 휴가가 전 국민 행사로 변해 일상 거주지를 떠나 낯선 곳에서 며칠 보내는 일을 뜻하게 됐다.

중앙일보가 기민했다. 67년 여름 바캉스 가이드를 제작해 해수욕장 정보를 제공하고, ‘중앙 바캉스’ 회원을 모집해 열풍을 불렀다. 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해변으로 가요’는 시민 가슴에 뿌리내렸다. 독재 정권도, 바가지요금도, 풍기 문란 단속도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를 막지 못했다. 음식을 나누며 더위를 쫓는 복날 나들이 전통과 인간다운 삶을 바라는 대중의 욕망이 결합해 결국 여름 휴가는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폭염이 사회 부조리 드러내

그러나 휴가 여행은 상처 난 자아를 치유하고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일로 변했다. 치유의 바다엔 향락의 파도가 몰아치고, 고독의 계곡엔 허세의 물결이 흘렀다. 여행은 자유와 위안을 주었으나 사람들은 사회 변화를 고민하는 주체가 아니라 고된 노동과 소비 중독을 왕복하는 진자로 변했다. 열심히 일해서 떠날 자격은 얻었으나 돌아오면 더욱더 일의 노예로 전락했다.

시인들은 이제 떠나는 자유에 낭만적 환상을 불어넣지 않는다. 그 대신에 찌는 듯한 폭염에서 인간 밑바닥과 사회 부조리가 드러나는 것을 직시한다. ‘캐치볼’에서 안희연은 여름을 “예고도 없이 날아”드는 “불타는 공”을 받는 시절이라고 말한다. 그 공은 어느 날 불쑥 문자로 날아드는 해고 통지 같은 것이리라. 우리 사회엔 과연 우리를 “쓰러뜨리기 위해 태어난 공”을 받아낼 슈퍼 글러브가 있을까.

강지혜는 ‘폭염’에서 무더위에 해산할 곳을 찾는 유기견을 통해 약자를 돌보지 않는 비정한 세상을 비판한다. “아이를 낳고부터/임신한 것들만 보면/다시 구역질을 한다// 그늘 한 자락 없는 뙤약볕/불은 젖을 끌고 발발발 걷는/개 한 마리를 보았다/하얗고 더러운 저 개는/해산할 곳을 찾을 수 있을까/이 더위에”. 아이를 낳을 어미가 “내일의 그늘과 마실 물”을 찾아 헤매도록 방치하는 세상이다. 이 가혹한 불평등이 합계 출산율 0.86의 대한민국을 낳았다. 타는 듯한 더위에서 죽어 가는 약자의 고통을 잊는다면 우리는 소멸의 파국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가혹한 폭염

폭염은 하루 중 낮 최고 기온이 33℃ 이상일 때를 말한다. 폭염은 모든 기상 재해 중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다. 행정안전부의 ‘2019 재해연보’에 따르면 2018~2019년 자연재해 사망자는 폭염 78명, 태풍 21명, 호우 2명이었다. 1994년엔 폭염으로 3384명이 사망해 지난 100년간 단일 기상 재해 중 가장 큰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폭염을 ‘소리 없는 살인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폭염은 피해 상황이 눈에 보이지 않고, 피해자 대부분이 노인, 1인 가구, 빈곤층이어서 관심을 끌지 못한다. 우리나라 폭염 관련 사망자 중 65%는 60세 이상 고령자이고, 나쁜 주거 환경, 낮은 소득 등 취약층 사망 위험도가 다른 계층보다 19.4%포인트 높다. 이는 『폭염 사회』에서 클라이네버그 뉴욕대 교수가 조사한 바와 일치한다. 95년 시카고 폭염으로 700명 이상이 죽었을 때 사망자 대부분은 고립된 사회적 약자였다.

2010년 이후 폭염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특히 2016년, 2018년 두 해엔 폭염이 심해 사망자가 각각 17명과 48명, 일사병 등 온열 질환자도 2125명과 4526명에 이르렀다. 폭염에 따른 노동력 감소, 전염병 확산, 가축 집단 폐사, 오존 등 대기오염 물질 증가 같은 사회 문제도 심각하다.

폭염의 원인은 기후 재앙이다. 인위적 온실가스 배출량이 되먹임되면서 온난화를 일으킨 결과다. 더욱이 한반도 평균 기온 상승 속도는 지구 평균의 2배에 가깝다. 기온이 1℃ 상승할 때마다 폭염 일수는 20일 늘고 사망 위험이 5% 증가함을 고려할 때, 적극적 기후 행동 없이는 2050년 무렵에는 여름 내내 40℃ 이상 폭염이 지속하고 사람들이 연일 죽어나가는 재앙을 맞을지 모른다. 갈수록 더워지니 올해 폭염은 앞으로 30년의 예고에 불과하다.

폭염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일으킨 재앙의 결과이고, 피해는 고령층·빈곤층에 집중되기에 사회적 재난이다. 인위적 재난은 우리가 행동을 바꾸면 없앨 수 있다. 탄소 배출량 감소, 저에너지 생활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