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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리셋 코리아

권력이 언론에 고삐 채우는 징벌적 배상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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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손영준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리셋코리아 자문위원

손영준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리셋코리아 자문위원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선진국은 모두 언론 자유가 보장된 나라다. 언론 자유 없이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나라는 지구 위 어디에도 없다. 그만큼 언론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에 필수적이다. 언론 자유는 모든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 자유이기 때문이다.

언론 자유 침해로 알 권리 축소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커

정부 여당이 제안한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언론 보도로 인한 손해배상이 대폭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먼저 30조 2항은 손해배상 기준금액을 많이 상향하도록 했다. 기준금액은 언론사 매출 상한(1000분의 1)과 하한(1만분의 1)을 고려해 정한다. 매출이 큰 방송·신문일수록 배상액이 커진다. 여기에 더해 특칙으로 고의 또는 중대 과실로 인한 허위·조작 보도의 경우에 위 금액의 최대 5배까지 징벌적 배상을 별도로 하도록 했다. 개정안은 또 대통령을 비롯한 정무직 인사들이 징벌적 배상을 활용할 길을 터놓았다. 권력이 악의적 허위 보도라고 주장하면 당장 막을 방법이 없다.

징벌적 배상제는 결국 언론에 고삐를 채우는 것이다. 말 안장에 탄 사람(권력)은 고삐(징벌적 배상제)를 통해 말(언론)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마부는 말 고삐를 느슨하게 잡고 있다가 필요할 때 원하는 방향으로 틀 것이다. 분명한 것은 권력이 고삐를 잡는 것은 언론 자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권력의 자비심에 의탁하는 언론 자유는 언론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비판 언론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제대로 된 언론은 권력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도 구제 방안이 있다. 언론중재위원회와 법원을 통해 중재·정정보도·반론보도·손해배상 절차가 있다. 피해 구제가 미흡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처럼 위자료라고 할 수 있는 손해액을 매출 규모에 연동하고 거기에 더해 최대 5배까지 징벌 배상을 하도록 하는 것은 사실상 형벌에 가깝다. 언론사는 징벌 배상제만으로도 위축될 것이다.

먼저 자기 검열을 강화할 것이다. 언론인의 도전적 취재는 줄어들 것이다.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검증은 약화할 것이다. 언론 보도는 권력이 정해주는 범위 안에서 이뤄질 것이다. 정부 여당의 자의적 지배를 피하기 위해 언론의 견제는 위축될 것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은 설 자리가 좁아질 것이다. 징벌 배상으로 사회가 잃을 손실은 더 크다. 언론의 위축은 알 권리 축소, 민주주의 후퇴로 이어질 것이다.

뉴스나 시사 보도 제작 등의 모든 언론 활동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 같다. 진실을 찾는 과정은 따라서 관용과 신뢰, 인내가 필요하다. 제작자는 물론이고 수용자도 그렇다.

물론 언론이 권력을 견제한다고 해서 스스로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수사권이 없다고 해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징벌 배상제는 언론 개혁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 물길과 말길은 열어두어야 한다. 보도에 문제가 있다면 논쟁과 토론을 더 거치도록 해야 한다. 반대 의견에 대해 반론권을 확대해야 한다. 손해배상액을 늘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언론은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언론이 책임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선순환적 구조가 필요하다. 형벌적 성격의 징벌 배상제는 선진국 어디에도 없는 제도이다. 우리 언론의 근간을 뒤흔들 것이다. 권력은 언론을 규제하는데 몰두할 것이 아니라, 공론장을 건강하게 유지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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