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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발상] 계백과 의자왕은 호남 사투리로 말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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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중훈, 오지명, 정진영 등 주연으로 2003년 개봉한 영화 '황산벌'의 한 장면. 660년 신라와 백제의 전투를 코믹하게 다룬 이 작품은 관객 277만명을 기록했다. [사진 쇼박스]

박중훈, 오지명, 정진영 등 주연으로 2003년 개봉한 영화 '황산벌'의 한 장면. 660년 신라와 백제의 전투를 코믹하게 다룬 이 작품은 관객 277만명을 기록했다. [사진 쇼박스]

대학 시절 영화 ‘황산벌’을 보러 갔다가 당혹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먼저 관람한 친구 A가 "신라와 백제가 각 지역 사투리를 쓰는데 재미있다"고 해서 기대가 컸는데, 웬걸. 김유신은 경상도, 계백은 전라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구사하더군요, 말 그대로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충청도 출신의 '순진한' 생각이었을까요. 당연히 의자왕과 계백 장군이 충청도 사투리로 말할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백제의 수도는 서울-공주-부여로 이동했을 뿐이니까요. 단 한 차례도 금강 이남으로 간 적이 없는데 호남 사투리라니요. "영화 어땠냐"는 A에게 이런 열변을 토했더니 그는 "아, 부여가 충청도였어?"라는 답변이 돌아오더군요. 그렇습니다. 동서 갈등을 '신라-백제'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많다 보니 어느새 '신라=영남' '백제=호남'이라는 구도가 굳어져 있습니다.

백제 수도는 부여, 영화 '황산벌'은 왜곡?

최근 논란이 된 이재명 경기지사의 '백제' 발언에서도 그랬습니다. 이 지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소위 백제, 호남 이쪽이 주체가 돼 한반도 전체를 통합한 예가 한 번도 없다…김대중 대통령이 처음으로 성공했는데 절반의 성공이었다. 충청과 손을 잡았다”라고 말했다가 논란에 휘말렸습니다.
대선 후보를 놓고 경쟁 중인 이낙연 전 총리 측은 "‘호남 불가론’을 내세우는 것”, 정세균 전 총리 측은 "백제라니? 지금이 삼국시대인가? 용납 못 할 민주당 역사상 최악의 발언”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이 발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이 지사만이 알겠지만 "소위 백제, 호남 이쪽"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백제=호남'이라고 인식했던 것만큼은 확실해 보입니다.

'백제' 논란으로 설전을 벌인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왼쪽)와 이재명 경기도지사. [연합뉴스]

'백제' 논란으로 설전을 벌인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왼쪽)와 이재명 경기도지사. [연합뉴스]

호남은 언제 백제가 됐을까 
흥미로운 점은 정작 학계에서는 호남이 백제에 편입된 것이 온조의 건국(BC 18년)에서 수백 년이 지난 후라고 본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수도만 서울-충청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호남은 백제의 긴 역사에서 절반 정도만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호남이 백제의 영토에 들어오게 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요.

①4세기: 근초고왕의 정복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이어서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게 하사하였다. 이에 그 왕 초고 및 왕자 귀수도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일본서기』 진구기(神功紀) 49년조의 기록입니다. 『일본서기』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쓰이는 등 일본 중심적으로 윤색된 것이 적지 않아 100%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삼국 관련 기록이 많기 때문에 고대사의 숨겨진 '퍼즐 조각'을 제공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진구기 49년의 기록도 한국 사서에서 볼 수 없는 백제의 한반도 남부 진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전성기 근초고왕 대 확장 영역. 학계는 이때 호남 지역이 백제에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자료 두산백과]

백제의 전성기 근초고왕 대 확장 영역. 학계는 이때 호남 지역이 백제에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자료 두산백과]

여기 나오는 백제왕 초고는 근초고왕, 왕자 귀수는 근구수왕이 유력합니다. 일본이 백제에 ‘하사’했다는 침미다례는 해남이나 강진으로 추정됩니다. 또 스스로 항복한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4읍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대개 전주와 김제 등 전북 일대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기록은 백제가 근초고왕 시절인 4세기 중반 호남에 진출했다는 정보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남해안을 확보한 백제는 이때 일본과 바닷길로 이어지면서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게 됩니다.

②6세기: 사비(부여) 천도 이후   
그런데 백제의 호남 진출이 이보다 늦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근래 진행된 발굴조사에 따르면 6세기 중엽까지도 옹관묘 등 백제와 다른 독자적 무덤양식이 영산강 일대에서 나타난다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고고학계에서는 6세기 중반까지 전남 일대에 백제 아닌 독자세력이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일각에선 백제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간 마한 세력이라고도 봅니다. 이 입장을 취하면 호남이 백제에 속했던 것은 불과 100년 안팎인 셈입니다.

백제의 호남 진출 이후 조성된 익산 미륵사지의 유적 [중앙포토]

백제의 호남 진출 이후 조성된 익산 미륵사지의 유적 [중앙포토]

백제 왕실은 충청도 사투리로 말했을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황산벌 전투 당시 백제의 수도는 사비, 475년 웅진 천도 후 백제 왕실은 충청도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의자왕과 계백은 충청도 사투리를 썼을까요. 그런데 이건 또 약간 다른 문제입니다.

중국 사서 『양서(梁書)』와 『주서(周書)』는 백제에 대해 “언어와 복장이 대략 고구려와 같다” “왕의 성은 부여씨이고 왕(王)의 칭호는 ‘어라하’라고 하는데 민중은 ‘건길지’라고 부른다”라고 적었습니다. 즉, 백제의 말은 고구려와 비슷한데, 지배층과 일반 민중이 쓰는 언어가 조금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백제의 지도층은 부여(夫餘)계어를, 일반인들은 한반도 남쪽에서 사용된 한(韓)어를 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여기서 부여계는 고구려와 백제가 공통의 조상으로 여겼던 부여(夫餘)를 가리킵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양아들이던 온조가 그의 친아들인 유리가 나타나자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한성 백제 왕도의 핵심유적인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에서 발굴·출토된 유물 600여 점 중 백제 왕실의 매장 의례를 보여 주는 화장 인골. [연합뉴스]

한성 백제 왕도의 핵심유적인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에서 발굴·출토된 유물 600여 점 중 백제 왕실의 매장 의례를 보여 주는 화장 인골. [연합뉴스]

백제의 역사 678년에서 공주(63년)와 부여(122년)가 수도였던 기간은 185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고구려에 밀려 남으로 내려가면서 현재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 출신이 늘어났겠지만, 그래도 지배층의 언어는 500년 가까이 사용한 북쪽의 부여계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추측입니다. 일본 왕실도 민간과 다른 말을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요.

황산벌 전투를 다룬 2003년 개봉한 영화 '황산벌'의 한 장면. [사진 쇼박스]

황산벌 전투를 다룬 2003년 개봉한 영화 '황산벌'의 한 장면. [사진 쇼박스]

백제어와 고구려어의 유사성은 유명한 살수대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충북 청주 인근에 있는 청천(靑川)의 옛 이름은 ‘살매(薩買)’입니다. 그런데 을지문덕이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살수(薩水)는 현재 평양 인근의 청천강(靑川江)이니, 고구려와 백제 모두 '청(靑)'이라는 의미로 '살(薩)'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홀(忽)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조와 비류가 각각 근거지로 선택한 위례홀과 미추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홀(忽)은 고구려에서 성읍을 의미하는 글자였습니다.

그러니 의자왕과 계백이 전라도 사투리로 말했을까, 충청도 사투리로 말했을까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한 신경전일지도 모릅니다. 시계를 되돌려 황산벌 전투로 돌아가 본다면 의자왕과 계백 장군은 모두 이북 사투리에 가깝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계백은 계씨였을까

조선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 등에 따르면 계백은 백제의 수도인 부여 출신으로 성씨는 백제 왕실과 같은 부여씨(夫餘氏)이고 이름은 승(承)이라고 전합니다. 즉, 부여승 장군이었던 셈이죠. 계백(階伯)은 높은 계급(階)과 존칭(伯)이 합쳐진 단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수서(隨書)』는 백제에 '대성8족'이라는 대귀족 집안이 있는데, 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劦氏)․·해씨(解氏)·정씨(貞氏)·국씨(國氏)·목씨(木氏)·진씨(眞氏)가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계백은 당시 백제의 16등급 관직 중 좌평(1등급) 다음인 달솔(達率)을 맡고 있었습니다. 대성8족이나 왕족(부여씨)가 아닌 집안에서는 맡기 어려운 벼슬이기 때문에 계백이 계씨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이 기사는 정동준 「백제 근초고왕대의 마한 영역화에 대한 사료 재검토」, 최성락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와 백제에 의한 통합과정」, 도수희 「百濟前期의 言語에 관한 諸問題」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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