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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질 지긋지긋" 빵 팔아 학비 낸 '빵돌이'···사진속 정세균

중앙일보

입력

“정치를 시작한 후 민주당의 가치와 신념에서 단 한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지난 6월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대선 출마선언에서 한 말이다. 그는 ‘신념’, ‘집념’ 등의 키워드를 즐겨 쓴다. 지난 4월 펴낸 저서 『수상록』에서는 “생긴 건 소프트하지만, 집념이 있다”고 스스로를 묘사했다. 별명이 ‘미스터 스마일’일 정도로 늘 웃는 인상이지만, 옛 사진엔 집념의 형성 과정이 그대로 묻어난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과 함께. 전북 진안 산골에서 태어난 정 전 총리는 어머니를 도와 산에 화전을 일구며 자랐다. 그는 "불타고 남은 나무 뿌리들을 캐내느라 손목이 얼얼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정세균 캠프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과 함께. 전북 진안 산골에서 태어난 정 전 총리는 어머니를 도와 산에 화전을 일구며 자랐다. 그는 "불타고 남은 나무 뿌리들을 캐내느라 손목이 얼얼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정세균 캠프

1950년 11월 전북 진안 산골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유년시절에 대해 “대부분의 기억은 배고픔을 참아내는 고통과 지긋지긋한 지게질이었다”고 회상한다. 형제들에 비해 키가 덜 자랄 정도로 나뭇짐을 자주 졌고, 마을에 흉년이라도 닥치면 밀기울(밀을 빻은 뒤 남은 찌꺼기) 수제비나 고구마 하나로 주린 배를 달래야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초등학교 시절(둘째줄 맨 왼쪽이 정 전 총리). 그는 초등학교에서 월반해 1년 일찍 졸업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정세균 캠프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초등학교 시절(둘째줄 맨 왼쪽이 정 전 총리). 그는 초등학교에서 월반해 1년 일찍 졸업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정세균 캠프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선친은 입버릇처럼 “반드시 가문을 빛내는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고 한다. 제5대 민의원 선거가 열렸던 1960년 10살 정세균은 읍내에서 본 선거 벽보 앞에서 “나중에 크면 저 벽에 내 얼굴이 그려진 벽보를 붙여야겠다”고 다짐했다. 36년 뒤 15대 총선에서 ‘벽보의 꿈’을 이룰 때까지 인생은 산 넘어 산이었다.

매점에서 일해 '빵돌이'라 불리면서도 학생회장을 지냈던 고교 시절 정세균 전 국무총리(왼쪽 아래가 정 전 총리). 그는 "교내의 작은 불합리에 저항해본 당시 행동은 집단적 궐기의 가치에 대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다"고 회고한다. 정세균 캠프

매점에서 일해 '빵돌이'라 불리면서도 학생회장을 지냈던 고교 시절 정세균 전 국무총리(왼쪽 아래가 정 전 총리). 그는 "교내의 작은 불합리에 저항해본 당시 행동은 집단적 궐기의 가치에 대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다"고 회고한다. 정세균 캠프

집 근처에 정식 중학교가 없어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고등공민학교’에서 공부하며 검정고시로 ‘중졸’이 됐다. 고등학교는 두 번을 옮겼다. 처음 다닌 무주 안성고는 배울 게 많지 않다는 생각에 6개월 만에 그만뒀다. 전주 공업고등학교로 옮겼지만,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게 못내 아쉽던 터에 “절대 바로 취직하지 말고, 대학에 가라”는 은사(故 한기창 선생님)의 격려에 힘을 얻어 전주 시내 인문계 고교인 신흥고 교장실을 무작정 찾아갔다.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그 자리에서 영어·수학 모의고사를 치러 입학 허락을 받았다. 학교 매점에서 빵을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다 ‘빵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73년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될 당시. 정세균 캠프

1973년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될 당시. 정세균 캠프

고려대 법대 졸업식에서의 정세균 전 국무총리. 정세균 캠프

고려대 법대 졸업식에서의 정세균 전 국무총리. 정세균 캠프

3수 끝에 고려대 법대(71학번)에 진학했고 1973년 총학생회장이 됐다. 정치로 입문에 앞서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는 계획은 “민주헌법이 아닌 유신헌법을 공부해 합격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친구의 말에 접었다고 한다. 기자의 길도 생각했지만 “긴급 조치로 언론도 재갈이 물려 있던 시절”이라 접었다. 결국 사회 첫발은 1978년 종합무역상사인 쌍용에 취직해 샐러리맨으로 딛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 군복무 시절 모습. 정 전 총리는 경북 안동에 있던 육군 제36사단에서 3년 복무 끝에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정세균 캠프

정세균 전 국무총리 군복무 시절 모습. 정 전 총리는 경북 안동에 있던 육군 제36사단에서 3년 복무 끝에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정세균 캠프

아내 최혜경 여사와는 대학교 3학년 때 미팅에서 만났다. 정세균은 군대 3년을 기다린 최 여사와 신입사원 시절 결혼했다. 경북 영일군(현 포항시) 출신인 최 여사의 부친은 훈장까지 받은 독립운동가였다. 장인은 딸이 호남의 가난한 집 아들과 혼인하는 걸 마땅찮아 했지만 이화여대를 졸업한 ‘신여성’ 장모의 후원 덕에 결혼에 성공했다.

1982년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쌍용 미국 주재원 시절 가족들과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찍은 사진. 정 전 총리는 ″미국 주재원 생활은 참 좋았다″면서도 ″그렇다고 눌러 살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녀들을 강제로 미국에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정세균 캠프

1982년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쌍용 미국 주재원 시절 가족들과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찍은 사진. 정 전 총리는 ″미국 주재원 생활은 참 좋았다″면서도 ″그렇다고 눌러 살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녀들을 강제로 미국에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정세균 캠프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쌍용의 미국 주재원 시절을 그는 “나빴던 위장까지 좋아질 정도로 좋았던 때”로 기억한다. 미국에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꿈을 포기하면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거야”라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부모의 선택으로 아이들이 미국에 살게 되는 건 불합리하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쌍용 미국 주재원 시절. 1988년 미국 롱비치항에 입항한 쌍용 시멘트 수출선에 올라 하역 작업을 주관하는 모습. 정세균 캠프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쌍용 미국 주재원 시절. 1988년 미국 롱비치항에 입항한 쌍용 시멘트 수출선에 올라 하역 작업을 주관하는 모습. 정세균 캠프

정치 입문 결심을 굳힌 데는 선거공영제를 확대한 1994년 ‘통합선거법’ 제정의 영향이 컸다. “이제 돈 안 드는 선거가 보장됐구나”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1995년 DJ가 영국에서 돌아올 무렵 회사에는 사표를, 당에는 입당 원서를 냈다. ‘DJ키즈’ 정세균은 이듬해 고향인 전북 진안·무주·장수(이른바 ‘무진장’)에서 처음 당선된 뒤 내리 4선했다. 19대 총선 때 ‘정치1번지’ 서울 종로로 지역구를 옮긴 건 대선 도전의 발판을 만든 승부수로 평가된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처음 출마한 총선인 1996년 제15대 총선 당시 벽보와 공보물 표지. 그는 고향인 전북 진안·무주·장수(이른바 '무진장')에 출마해 당선된 뒤 그곳에서만 내리 4선을 했다. 정세균 캠프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처음 출마한 총선인 1996년 제15대 총선 당시 벽보와 공보물 표지. 그는 고향인 전북 진안·무주·장수(이른바 '무진장')에 출마해 당선된 뒤 그곳에서만 내리 4선을 했다. 정세균 캠프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김대중 전 대통령. 정세균 캠프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김대중 전 대통령. 정세균 캠프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2002년 그의 대선 캠프 정책실장을 맡으면서 깊어졌다. 당시 노무현 후보 지지율이 15%까지 떨어지며 당 안팎에서 후보 교체 요구가 거세지던 국면서도 그는 캠프를 지켰고, 2004년엔 탄핵소추안 의결을 저지하기 위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의장석을 점거했다. 정 전 총리는 지난 28일 TV토론의 ‘그때 그 시절’ 코너에 점거 농성 3일째 새벽에 찍힌 한 장면을 내보였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노무현 전 대통령. 정세균 캠프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노무현 전 대통령. 정세균 캠프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 처리를 막기 위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의장석을 지키고 있는 정세균 전 국무총리. 정세균 캠프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 처리를 막기 위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의장석을 지키고 있는 정세균 전 국무총리. 정세균 캠프

2016년 6선이 된 정세균은 국회의장이 돼 의장석에 ‘합법적’으로 앉았다. 그 사이 2006년 산업자원부 장관, 2008년 통합민주당 대표 등을 거쳤다. 문재인 정부의 두 번째 국무총리까지 지낸 뒤 그의 별명은 ‘대통령 빼곤 다 해본 사람’이다. “대통령까지 하려는 건 너무 욕심이 많은 것 아니냐” 물음에 정 전 총리는 “대통령은 ‘벼슬’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지난 29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그는 “세 분의 대통령을 모시면서 대통령은 고통스럽고 헌신을 요하는 자리란 걸 잘 알게 됐다”며 “그분들께 배운 것을 국민들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데 쓰고 싶다”고 말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당시 국회의장)가 2016년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세균 전 국무총리(당시 국회의장)가 2016년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지난 3월 1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지난 3월 1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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