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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 사과, 내킬때 해줄거지?" 남북이 연인이라면 딱 이꼴 [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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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北 사과 없는 통신선 복원

경기도 파주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북한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와 남한 대성동 마을의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이고 있다. 뉴스1

경기도 파주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북한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와 남한 대성동 마을의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이고 있다. 뉴스1

"남들은 네가 깡패라고도 하고 악당이라고도 했지만, 거친 겉모습 뒤 깊은 내면에 숨어 있는 선함을 난 볼 수 있었어. 우리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때 기억나? 나한테 제대로 맛보게 해주겠다며 평양냉면도 멀리 현지에서 직접 공수해왔잖아. 

내가 원한 이별도 아니었지. 정말 오해였어. 하지만 “나보다 친구가 더 중요하냐”면서, 넌 그렇게 날 떠났어. 떠날 때 보니 너 참 모질더라. 휴대전화 번호부터 바꿔버리더니, 우리가 매일 만나던 집 앞 그 벤치는 불 질러서 아예 부숴버렸더라.  

하지만 그래도 난 네가 너무 그리웠어. 그래서 쓴 편지, 너의 답장을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리고 너의 새 전화번호를 다시 나에게 줬을 때 난 더는 바랄 게 없었어. 어서 너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뿐이었지.

우리 가족들은 네가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사과 한마디 없이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통화할 수 있느냐고 해. 사실 너희 집 형편이 요새 많이 어렵다는 것도, 나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난 너만 있으면 돼. 그리고 언젠가 네가 내키면, 사과도 해줄 거지? 그럼 됐어. 나만은 네가 선한 사람이라고 믿어."

남북 관계가 연인 사이라면 마치 이런 상황일까. 27일 남북 간 통신연락선 복원 발표를 접한 뒤 든 생각이다.

남북군사당국 간 통신선이 복구된 27일 군 관계자가 서해지구 군 통신선 시험 통신을 하고 있다. 뉴스1

남북군사당국 간 통신선이 복구된 27일 군 관계자가 서해지구 군 통신선 시험 통신을 하고 있다. 뉴스1

통신선 복원은 반길 일이다. 이유가 뭐가 됐든 북한이 스스로 슬쩍 문을 열어보며 자발적 고립을 깨고 나올지 고민을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를 남북 관계 개선의 기회로 삼으려는 의지를 다질 만 하다.
하지만 그래도 짚을 건 짚어야 한다. 지난해 6월 북한의 개성 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한 책임이다.

北 사과 없다 지적에 “꼬투리 잡기”

정부는 해당 사건들에 대한 북한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있었느냐는 지적에 “앞으로 협의해 나갈 문제”(27일 청와대 관계자)라거나 “통신선 복원이 우선 가장 먼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27일 통일부 당국자)고 했다. 통신선 복원 전 북한의 유감 표명조차 없었다는 뜻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남북 정상회담에 직접 관여한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9일 라디오 방송에서 “야당 일각에서는 왜 연락사무소 폭파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그건 너무 성급한 이야기”라며 “무리한 꼬투리 잡기”라고 말했다.
“서로 싸웠는데 네가 잘못했는지 내가 잘못했는지 판별 받고 다시 화해하자고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평생 얼굴 안 보고 살 사람도 아니고 한민족이고 바로 이웃에 있는 북한이지 않으냐”면서다.

조선중앙TV가 보도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장면. 뉴시스

조선중앙TV가 보도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장면. 뉴시스

폭파에 분노한 정부, 행동은 없어

남북이 차근차근 추후 협의를 통해 북한이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게 예정된 수순이라면 지금 나오는 관련 지적들은 그의 말대로 꼬투리 잡기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막무가내식 버티기만큼이나 걱정되는 건 그간 정부가 보여온 일련의 태도들이다.

개성 연락사무소 폭파 뒤 정부는 분노했다. 김유근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은 “북한은 이번 행동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북한에 대한 배상 요구는커녕 공개적 문제 제기 등 정부 차원에서 가시적 후속 조치는 없었다. “연락사무소가 폭파되는 등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기본적으로 (제재 위반 여부를 논의하는)워킹그룹이 사사건건 남북관계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2020년 6월 16일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라며 폭파 원인을 한ㆍ미가 제공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연합뉴스

잘못이라도 한 듯 시정조치 쏟아내

더 주목할만한 건 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건 북한인데, 오히려 잘못한 사람처럼 군 건 한국이었다는 점이다.

폭파 직후인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은 통일부 장관 등을 교체했다. 큰 사건 뒤 인사는 신중히 해야 한다. 상대에게 잘못이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시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남북 화해’를 내세우며 외교ㆍ안보 라인을 물갈이했다.

폭파의 원인으로까지 지적된 한ㆍ미 워킹그룹은 급기야 지난달 ‘운명’했다. 간판을 바꿔 달 뿐 기능은 유지될 가능성이 크지만, 북한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이름을 잃었다.

애초에 북한이 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며 이유로 댄 대북 전단 살포는 지난해 12월 대북전단금지법 입법이 이뤄지며 아예 불법행위로 규정됐다.

최근 남북관계 주요 일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최근 남북관계 주요 일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北 책임 묻는 요구사항도 안 정해

사과를 해야 할 쪽은 가만히 있고, 사과를 받아야 할 쪽에서 분주히 시정 조치를 하기 바쁜 모양새였다.

이는 정부가 과연 ‘사과받을 권리’를 행사할 의지가 충분히 있는지에 대한 ‘합리적 의심’으로 이어진다.
실제 정부는 연락사무소 폭파와 관련한 북측의 책임을 묻기 위한 요구 사항조차 제대로 정한 적이 없다. 공허한 규탄이 사실상 끝이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008년 박왕자씨 피살 사건 이후 정부는 금강산 관광 중단 조치를 발표하며 재개를 위한 선결 조건으로 ▶진상 규명 ▶재발 방지책 마련 ▶관광객 신변안전 조치 마련 등을 정했다. 북한이 이를 거부하며 이 때문에 오히려 금강산 관광 재개의 길이 막혔다는 비판도 나왔지만, 국민의 생명이 걸린 사안에서 정부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을 정해야 하는 건 국가의 책무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마지노선은 어디 그어져 있나. ‘사과받을 권리’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 국민은 궁금하다. 정부가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데, 북한이 사과할 의무를 이행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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