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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쏴!” 그래야 명중한다…예수·장자·혜능 ‘집착 없는 사랑’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1.07.31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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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장면1

『장자』의 ‘외편’에 나오는 일화다. 사람들이 활쏘기 내기를 했다. 질그릇을 걸고 내기를 했더니 과녁을 제대로 맞혔다. 이번에는 값이 더 나가는 띠쇠를 걸었다. 그러자 명중률이 좀 떨어졌다. 마지막에는 황금을 걸었다. 그랬더니 화살은 아예 과녁을 빗나갔다.

아브라함이 말년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늘에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있다. [중앙포토]

아브라함이 말년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늘에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있다. [중앙포토]

#장면2

정상급 골프 선수들의 단골 어록이 있다.

“힘을 빼라. 어깨에 힘을 빼고, 팔에 힘을 빼고, 손에 힘을 빼라.”

이 모두에 힘을 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 마음에 힘을 빼면 된다. 자꾸만 어깨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건 욕심 때문이다. 승부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그런데 물음이 생긴다. “욕심을 갖고, 집착을 품어야 더 멋진 샷이 나오는 게 아닐까. 그래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그런데도 왜 프로들은 거꾸로 힘을 빼라고 하는 걸까. 이유가 있다. 힘을 주면 비거리와 정확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집착이 강할수록 몸이 굳고 샷이 망가지는 까닭이다.

골프를 아는 골퍼들은 말한다. "어깨에 힘을 빼고, 팔에 힘을 빼고, 마음에 힘을 뻬라."

골프를 아는 골퍼들은 말한다. "어깨에 힘을 빼고, 팔에 힘을 빼고, 마음에 힘을 뻬라."

#장면3

중국 땅에 선불교의 꽃을 활짝 피웠던 육조 혜능 대사는 『육조단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게 무슨 뜻일까. 간단하다. 힘을 빼고 스윙을 하라는 말이다. 집착 없이 마음을 쓰라는 뜻이다. 그럼 왜 이 구절 앞에 ‘마땅히(應)’라는 글자가 붙을까. 빗방울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듯이, 그게 지당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만약 혜능 대사가 “머물지도 말고, 마음도 내지 마라”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럼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요즘도 ‘수행=고요한 상태만 유지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고요하게만 있고 스윙을 하지 않으면 어찌 될까. 우리는 일상의 삶을 꾸려갈 수가 없게 된다.

⑪예수가 말한 행복은 일회용 반창고가 아니다

해가 하늘 높이 올랐다. 이스라엘은 겨울에 비가 많이 내린다. 그래서인지 갈릴리 호수 주변도 초록이 무성했다. 수년 전 여름에 왔을 때보다 더욱 푸르렀다. 햇볕은 따사했다. 한국으로 치면 봄볕이었다. 주위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다.

갈릴리 호숫가에는 노란 겨자꽃이 풍성하게 피어 있었다. 저 멀리 티베리아스의 건물들이 보인다.

갈릴리 호숫가에는 노란 겨자꽃이 풍성하게 피어 있었다. 저 멀리 티베리아스의 건물들이 보인다.

특히 노랗게 무리 지어 하늘거리는 겨자 꽃이 참 예뻤다. 2000년 전에도 저런 들꽃들이 있었겠지. 예수가 ‘가난한 마음’을 설하며 사람들이 거머쥔 집착을 겨냥할 때도 겨자 꽃이 주위에 만발해 있었겠지.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누가복음 18장 29~30절)

사람들은 이 구절도 종종 오해하여 무작정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따르려면 집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처자식도 팽개치고 따라나서야 한다고 풀이한다. 그 대가로 천국에서 상을 받는다고 여긴다.

예수가 겨눈 건 그런 식의 ‘맹목적인 충성’이 아니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그런 예수가 하물며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을까. 예수가 겨누었던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집착’이다.

나사렛 마을에 있는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 사진은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있었던 옛마을의 유적이다.

나사렛 마을에 있는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 사진은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있었던 옛마을의 유적이다.

그럼 예수는 왜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라고 했을까. 이유가 있다. 그들에 대한 집착이 하느님 나라를 가리기 때문이다. 그런 집착을 안고서는 진정으로 예수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리라고 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버리라고 한 게 아니라 ‘가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말이다. 그런 뒤에야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집착 없는 사랑이 가능한가. 집착이 있어야 사랑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건 ‘작은 사랑’이다. 어찌 보면 사랑의 가면을 쓴 욕망이다. 예수는 큰 사랑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이 집착하는 바를 자식에게 강요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결과는 대개 좋지 않다. 반면 자식을 지혜롭게 키우는 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집착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대한다. 집착 없는 사랑이다. 그게 혜능 대사가 말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사랑과 통한다.

마카리오이! 마카리오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나 말리고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나 말리고 있다.

구약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브라함은 말년에 아들을 얻었다. 그러니 얼마나 애지중지했을까. 그 집착이 오죽했을까. 그런 집착이 하느님 나라를 가리기라도 했을까.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아킬레스건’을 찔렀다.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어린 양이 아닌 어린 자식을 번제에 바치라니 말이다.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던 아브라함은 결국 산으로 가서 아들을 향해 칼을 빼 든다. 그때 신의 음성이 들린다.

우리의 마음이 무언가를 틀어쥐고 있을 때는 들리지 않는다. 신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그걸 내려놓을 때 비로소 들린다. 신의 음성이 들린다. 그러니 집착 없이 마음을 내는 이에게 하느님 나라가 드러나는 법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꾸만 강조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팔복교회에서 내려다보면 갈릴리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예수는 저 어디쯤 언덕에서 산상수훈을 설했을 터이다.

팔복교회에서 내려다보면 갈릴리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예수는 저 어디쯤 언덕에서 산상수훈을 설했을 터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가 설한 행복은 깊다. 로또에 당첨됐을 때 덩달아 따라오는 얕은 행복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식의 ‘사라지는 행복’이 아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서 ‘행복’은 그리스어로 ‘마카리오이(Makarioi)’다. 잠시 작용하고 사라지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이다.

‘마카리오이’는 신의 속성을 공유할 때 피어나는 행복이다. 신의 속성은 하느님의 속성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마음이다. 그 마음 자체가 ‘마카리오이’이다. 그래서 예수의 행복론은 요즘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붙여대는 ‘일회용 행복 반창고’와는 차원이 다르다.

내면을 향하는 눈

칼 하인리히 블로흐의 작품 '산상수훈'.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각자 처지에 따라 제각각이다.

칼 하인리히 블로흐의 작품 '산상수훈'.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각자 처지에 따라 제각각이다.

팔복교회의 입구 위에는 칼 하인리히 블로흐의 ‘산상수훈’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림 속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이다. 바위 앞의 남자는 두 손을 모은 채 마음을 연다. 그는 예수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설교에 집중한다.

그의 왼편에 앉은 여인은 깍지 낀 손을 이마에 댄 채 눈을 감았다. 예수의 메시지가 이미 그녀의 가슴을 찔렀기 때문이다.

가장 맑은 얼굴로 예수의 메시지를 듣는 이는 여인 뒤에 선 어린아이다. 반면 바위 뒤편의 나이 지긋한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예수를 노려본다. 유대의 율법과 너무나 다른 산상수훈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인다. 여인의 눈은 내면을 향하고, 남자의 눈은 바깥을 향한다. 2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누구의 눈은 안을 향하고, 누구의 눈은 밖을 향한다. 예수가 우리에게 묻는다.

“너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12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프로골퍼 최경주 선수는 한국과 아시아를 거쳐 미국 무대에 진출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에 성적이 나빠 다시 PGA 테스트를 봐야 했습니다.

퀄리파잉 테스트를 보는 150명의 선수들 중 35등 안에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PGA투어에서 뛰는 티켓을 딸 수가 있었으니까요.

그 티켓이 없으면 어떻게 되냐고요? 그럼 한국으로 영영 귀국해야 할 지도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최경주 선수의 PGA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 처지였습니다.

테스트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최 선수의 순위는 49위였습니다. 순위별로 대충 스코어를 계산해 봤더니, 마지막 날에 4언더(-4타)를 쳐야 했습니다.

기독교인인 최경주 선수는 숙소에서 나와 가까운 한인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 내용이 참 각별했습니다.

최 선수는 “하나님, 제가 4언더를 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제가 마음을 비우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건 채움의 기도가 아니라 비움의 기도였습니다.

이튿날 테스트의 마지막 경기가 열렸습니다. 최 선수는 마지막 홀에서 3m짜리 퍼팅을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공이 들어간다면 성적이 4언더(-4타)였습니다. 그럼 테스트를 통과할 상황이었습니다. 공이 안 들어가면 탈락할 위기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떨렸을까요. 퍼팅 하나에 자신의 골프 인생이 걸렸으니 말입니다. 최 선수는 퍼팅을 하려고 공 앞에 섰습니다.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손이 너무 떨렸습니다. ‘덜덜덜’하고 눈에 보이게 떨리면서 도무지 멈출 생각을 안 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절대 공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최경주 선수는 다시 자세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어젯밤의 기도를 떠올렸습니다.

“주님, 제가 마음을 비우고 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공 앞에 다시 섰습니다. 그러자 떨리던 손이 ‘딱’ 멈추었습니다. 그는 “정말 거짓말처럼 긴장이 풀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마지막 홀에서 마지막 퍼팅을 했습니다. 3m를 굴러간 공은 홀 안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테스트를 통과한 최 선수는 그린 위에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곁에 있던 아내도, 캐디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담당 캐디도 최 선수의 절박한 상황을 다 알고 있었거든요.

최경주 선수에게서 이 이야기를 직접 들었을 때, 저는 기도의 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채움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갖게 하고, 저것을 갖게 하고, 내게 없는 무언가를 꾹꾹 눌러 채워달라는 채움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그 기도는 ‘비움의 기도’였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비워서 가장 자연스러운 스윙을 하게 해달라는 비움의 기도였습니다.

저는 거기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스윙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집착하지 않는 스윙이 더 큰 스윙이고, 집착하지 않는 사랑이 더 큰 사랑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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