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한끼

이상과 사별 후 김환기 만난 김향안, 샌드위치 반쪽 즐겨

중앙선데이

입력 2021.07.31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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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호 27면

예술가의 한끼

 김향안, 뉴욕 베르디 아파트, 1986년. [사진 임영균, 황인]

김향안, 뉴욕 베르디 아파트, 1986년. [사진 임영균, 황인]

김향안과 변동림은 이명동인이다. 김향안(1916~2004)의 원래 이름은 변동림이다. 그녀는 시인 이상(李箱·1910~1937)과 함께 살았다. 화가 김환기(金煥基·1913~1974)와 인연을 맺자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 김동림이란 이름도 존재한다.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그녀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시인 이상과 같이 살 때엔 변동림
김환기 만나 개명, 뉴욕에서 생활
식당에서 빵 하나시켜 나눠 먹어

수필·소설가이자 화가인 신여성
새 무서워했는데 남편은 새 잘 그려
꿈꾸던 ‘환기미술관’ 1992년 개관

변동림은 나이 스무 살에 이상을 만났다. 격렬한 사랑이었고 급격한 결합이었다. 둘은 결혼식을 올리고 서울에서 넉 달쯤 함께 살았다. 어느 날 이상은 갑자기 도쿄로 떠났다. 몇 달 후 이상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의 변동림이 도쿄대 부속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절망적인 상태였다. 이상은 센비키야(千疋屋)의 멜론이 먹고 싶다고 했다. 니혼바시의 센비키야까지는 갈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병원 근처의 노점에서 멜론을 사왔으나 이상은 한 조각도 못 넘기고 생을 마감했다. 1937년 4월의 일이다.

변동림은 1944년 수화(樹話) 김환기와 결혼한다. 김환기로부터 향안(鄕岸)이란 이름을 얻었다. 화가 김용준은 지금도 그 터와 감나무가 오롯이 남아 있는 서울 성북동 노시산방(老柿山房)을 이 부부에게 내주었다. 집이름은 수화와 향안의 수향산방(樹鄕山房)으로 바뀌었다.

유학생 후배들에게 두툼한 용돈 줘

해방이 되자 김환기는 서울대 미대 교수(1948~1950)가 됐다. 전쟁이 났다. 이번에는 홍익대 교수(1953~55, 1959~62)로 옮겼다. 김환기는 미술의 본향을 찾아 멀리 가고 싶어 했다. “외국은, 구라파는 꿈에나 가 보고, 살기는 철저히 우리 한국에서 살기로 했습니다”(김환기, 『그림 안 파는 이야기』, 1955년). 수입이 변변찮아 막연하게 외국행의 꿈만 꾸고 있는 김환기에게 김향안은 “그럼, 내가 파리로 먼저 가지 뭐” 하며 단독으로 파리행을 결행했다. 1년 동안 파리에서 공부하고 화랑들도 알아본 후 1956년 김환기를 파리로 불렀다. 둘은 3년 동안 함께 파리에서 살았다. 서울로 돌아온 부부는 1963년 김환기가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한국대표로 참가하게 된 걸 계기로 뉴욕으로 가서 정착하게 된다.

김향안의 자필원고 . [사진 임영균, 황인]

김향안의 자필원고 . [사진 임영균, 황인]

김향안·김환기 부부의 거처는 뉴욕 맨해튼에 있었다(160 W. 73 St). 작곡가 베르디를 기념하는 베르디공원의 동쪽 컬럼버스 애비뉴와 앰스터댐 애비뉴 사이의 베르디 아파트 1층이었다. 살림집과 작업실을 겸하였다. 아파트를 나오면 남북으로 뻗은 브로드웨이가 지척이다.

“점화가 성공할 것 같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다”(김환기 일기, 1965년 1월 2일)라고 말한 김환기였다. 남북으로 쭉 뻗은 브로드웨이가 자연의 질서라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직사각형의 맨해튼을 수직으로 그어 나간 에비뉴들은 인공적이고 조형적인 질서다. 이 두 개의 질서가 만나면 베르디공원 같은 예리한 각도의 삼각형 구조가 불거져 나온다. 평생 자연의 질서와 조형의 질서 사이를 오가며 작품을 한 김환기의 미학에 딱 어울리는 최상의 터전이었다.

부부가 한 끼를 때우기 위해 자주 찾은 곳은 집에서 북쪽으로 두 블록 떨어진 브로드웨이의 베르디 델리라는 자그마한 식당이었다. 그리스인이 경영하는 이탈리아풍의 식당이었다. 델리답게 햄, 소시지, 치즈, 피클 등 기본재료를 갖다 놓고선 주문을 받으면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서 내놓았다. 가격은 중저가였으나 따뜻한 가정식 요리에서 고급스러운 기분이 났다.

김환기와 김향안이 주문하는 건 늘 샌드위치였다. 호밀빵 또는 흰 빵에 로스트 비프를 끼운 간결한 재료의 샌드위치였다. 큰 사이즈를 하나 시켜 둘로 나누어 먹었다. 가난한 두 예술가들의 식사는 검박했으나 대화는 화려한 지성의 재료와 신선하고 재기발랄한 언어의 요리로 빛났다. 신여성 서울여자 김향안 앞에선 남도풍의 섬 사나이 김환기는 왠지 말이 많아졌다.

부부의 주변에 뉴욕의 한인 예술가들이 모였다. 동년배인 김병기(1916~), 김포(1917~2014), 후배 격인 조각가 한용진 화가와 문미애 부부, 화가 김창열, 조각가 존배 등은 물론이고 여기에 마태 김정준(1928~2021) 등 한인 의사들도 가세했다. 소설가 김말봉의 딸인 전재금과 김정준 부부는 김환기, 김향안 부부를 극진히 모셨다. 김환기가 정착한 뉴욕을 1년 후 서울의 김향안이 가게 되는데 이때 항공권을 마련해 준 사람도 김정준이었다. 김정준 부부는 최근 화제를 모은 대형작품 ‘우주’ 등 꾸준하게 김환기의 작품을 컬렉션하였다. 이들과는 미드타운의 고급 이탈리아 식당에 가서 격식을 갖춘 파티를 벌였다.

미술관 옆에 ‘수향산방’ 지어 살아

변동림(김향안의 원래 이름)이 스무 살이었을 때 만나 결혼했던 시인 이상(左), 이상과 사별 후 김향안과 1944년 결혼한 화가 김환기(右). [사진 임영균, 황인]

변동림(김향안의 원래 이름)이 스무 살이었을 때 만나 결혼했던 시인 이상(左), 이상과 사별 후 김향안과 1944년 결혼한 화가 김환기(右). [사진 임영균, 황인]

김환기가 타계하자 새로운 세대의 후배들이 뉴욕을 찾아왔다. 김차섭·김명희 부부, 황인기, 박관욱, 임영균 등이 김향안의 주위에 모였다. 김향안은 박관욱(1950~)과 친했다. 김환기와 함께 가던 베르디 델리를 박관욱과 함께 다녔다. 걸음이 빠른 박관욱더러 먼저 가서 주문을 미리 하게 했다. 5분 후에 합류한 두 사람의 메뉴는 여전히 큰 사이즈의 샌드위치 하나를 둘로 나눈 것과 커피였다. 생김새가 서로 많이 다른 김환기와 박관욱의 유일한 공통점은 다변이었다.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쉴 새 없이 떠들던 김환기의 수다가 김향안은 그리웠다.

여유가 생기면 32번가 한인촌의 강서회관으로 가서 갈비, 불고기에 냉면을 먹었다. 가끔은 차이나타운에서 광동식 게 요리를 먹었다. 김향안은 소고기를 좋아했다. 어릴 때 아프면 집에서 떡갈비를 해 주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떡갈비가 생각났다. 일찍 프랫대학의 교수가 된 조각가 존배의 부부는 뉴욕의 한인 예술가들을 브루클린의 작업실 겸 살림집으로 자주 초대했다. 존배 부인은 서울에서 간장, 된장, 고추장을 공수해 왔다. 한식이 그리우면 존배를 찾으면 됐다.

뉴욕 브루클린 존배 스튜디오에서의 김향안(가운데 안경 쓴 사람). 앞줄 아이는 존배의 아들 아이언배. 소파엔 백남준이 앉아 있다. 1986년. [사진 임영균, 황인]

뉴욕 브루클린 존배 스튜디오에서의 김향안(가운데 안경 쓴 사람). 앞줄 아이는 존배의 아들 아이언배. 소파엔 백남준이 앉아 있다. 1986년. [사진 임영균, 황인]

생활은 무척이나 검소한 김향안이었지만 후배들에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향안의 부름을 받은 유학생 임영균은 베르디 아파트로 가서 1시간 가량 김환기의 소품과 스케치북을 촬영했다. 임영균이 요구한 촬영비용은 필름 두 통값 10달러였다. 김향안은 한사코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그 속에 든 것은 1달러 지폐를 100장씩, 5달러짜리 지폐를 20장씩 야무지게 고무줄로 묶은 돈뭉치로 합이 1000달러였다. 1980년대 중반 맨해튼 21번가의 아파트 월세가 300달러였으니 1시간 수고비로는 너무나 큰돈이었다. 말하자면 후배를 위한 장학금이었던 셈.

김향안의 꿈은 김환기 미술관을 짓는 일이었다. 그건 김환기의 꿈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남불에 지을까도 생각했다. 그리하면 수화의 그림은 해외에 나가 영영 국내로 들어올 수가 없게 된다. 마침 현대화랑이 사택을 부암동에 짓는다는 걸 김향안이 알게 됐다. 김향안의 결기는 부암동으로 향했다. 그 결기에 현대화랑 대표 박명자는 흔쾌히 부암동 땅을 기증하다시피 내놓았다. 사택을 설계하던 건축가 우규승은 설계를 취소하고 대신 들어설 환기미술관을 설계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김환기의 작품들을 국내로 들여왔던 박명자와 원화랑의 대표 정기용은 이번에는 환기미술관의 건립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커미션도 없이 수화의 소품과 판화들을 팔아야 했다.

김향안 특유의 끈기와 열성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힘이 더해져서 드디어 1992년에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이 개관했다. 뉴욕에 있던 김환기의 작품들이 고스란히 서울로 왔다. 김향안은 미술관 옆에 수향산방을 짓고 살았다. 김향안은 환기미술관 근처의 자하손만두의 만두요리와 빈대떡, 삼청동 수제비의 찹쌀새알 옹심이를 즐겼다.

김향안은 수필가, 소설가에 미술이론가였고 화가였다. 뉴욕의 아파트에는 오전 중에 잠시 햇살이 들어왔다. 그 햇살이 너무 귀하고 아까워서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들로 1988년에 서울의 원화랑에서 전시를 했다.

유달리 새를 무서워했던 김향안, 새 그림을 즐겨 그렸던 김환기, 소설 ‘날개’를 썼던 이상. 이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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