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미 제1 갑부 록펠러가, 중 공산화 후에도 통 큰 기부

중앙선데이

입력 2021.07.31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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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7〉

협화의학원 예과생들은 3년간 옌칭(燕京) 대학에서 인문교육을 받았다. 1920년대 옌칭 대학의 여자야구부. [사진 김명호]

협화의학원 예과생들은 3년간 옌칭(燕京) 대학에서 인문교육을 받았다. 1920년대 옌칭 대학의 여자야구부. [사진 김명호]

19세기 말, 미국 제1의 부자로 등극한 록펠러는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고심했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던 록펠러는 자신을 기쁘게 했던 돈이 타인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기부를 결정하자 시작과 동시에 도움 청하는 개인과 단체가 줄을 이었다. 기부받는 사람은 묘한 속성이 있었다. 매년 1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해도 요구가 그치지 않았다. 거부하면 ‘만악(萬惡)의 자본가’라며 비난이 들끓었다. 가재를 탕진해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자 한곳에 집중하기로 작심했다. 은퇴를 선언하고 장원(莊園)에 칩거했다.

중 문명·지식인 우수성에 경외심
질병·기아 퇴치 위해 의학 지원
신중국 출범 뒤 협화의원서 손떼

17세기 중국 온 예수회 선교사들
사서삼경 외우고, 선비 옷 입어
중국인들 “서양의 유학자” 존경

록펠러는 교육을 중요시했다. 시카고대학 건립에 거액을 지원했다. 공짜 좋아하기는 당시의 미국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보다 못한 목사 한 분이 록펠러에게 경고나 다름없는 충고를 했다. “재물은 굴러다니는 돌과 같다. 쌓이는 것보다 흩어지는 속도가 빠르다. 자손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나쁜 습관에 함몰되기 쉽다. 살아있는 동안, 인류의 이익을 위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자선단체를 만들어라.” 록펠러 부자(父子)는 목사의 의견에 공감했다. 록펠러재단을 출범시켰다.

록펠러재단, 미 첫 의료연구소 설립

록펠러재단은 안양추(晏陽初)가 시작한 중국 향촌 건설과 평민교육의 후원자였다. 안은 1943년 5월, 아인슈타인과 함께 혁명적인 인물 10인에 선정됐다. [사진 김명호]

록펠러재단은 안양추(晏陽初)가 시작한 중국 향촌 건설과 평민교육의 후원자였다. 안은 1943년 5월, 아인슈타인과 함께 혁명적인 인물 10인에 선정됐다. [사진 김명호]

재단은 의학에 중점을 뒀다. 1901년, 미국 최초의 의료연구소를 설립해 인류 고난의 근원인 질병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유행성 뇌막염, 소아마비, 광견병, 매독, 황열병 퇴치에 성과가 있자 해외로 눈을 돌렸다.

록펠러재단은 중국을 선택했다. 이유가 있었다. 20세기 초반 중국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국이었지만 빈곤하고, 독립된 문명 고국(古國)이었다. 자의건 타의건, 개방과 개혁이 진행 중이다 보니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이 미약했다. 동방문화를 대표하는, 고루하지 않은 우수한 지식인들도 도처에 널려 있었다. 중국 외에도 빈곤한 큰 나라는 있었지만, 나머지 특징은 중국이 유일했다.

협화의학원(協和醫學院) 전신인 베이징의학원 교수 존스톤이 록펠러재단에 보낸 장문의 서신이 록펠러 부자의 결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중국을 꿰뚫어 본 내용이기에 간추려 소개한다. “미국이 중국을 도울 시기가 도래했다.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중국인이 깨달았다. 중국 청년들은 서양의학 배우기를 갈망한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이 위대한 국가에 의학의 기초를 닦아주는 일이다. 중국 의사들의 품성을 정립시킬 원대한 계획이 필요하다. 중국의 변화는 신속하다. 만주족 황제의 통치가 하루아침에 쑨원(孫文·손문)의 공화국으로 변했다.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쑨원을 밀어낸 것도 순식간이었다.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공포하더니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 지금 우리는 위안이 면류관 썼다는 소식만 기다리는 중이다.”

협화의학원은 세계적인 난산 전문의 린차오즈(林巧稚·앞줄 오른쪽 둘째)를 배출했다. [사진 김명호]

협화의학원은 세계적인 난산 전문의 린차오즈(林巧稚·앞줄 오른쪽 둘째)를 배출했다. [사진 김명호]

존스톤은 중국인의 습관과 주의사항도 상세히 적어 보냈다. “중국은 온갖 질병이 들끓는 나라다. 미국의 의학도들에게 이처럼 좋은 실험장이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20세만 넘으면 모든 걸 다 안다고 자부한다. 절대 필요한 것이 아니면 남의 영향 받기를 싫어한다. 미국인이 중국인을 교육시키며 배울 기간은 길지 않다. 지금 중국은 기아에 허덕인다. 우리가 주는 새로운 것을 흡수할 준비가 갖춰졌다. 미국이 돌려준 경자년 배상금으로 설립한 칭화학당(淸華學堂)이 좋은 예다. 지금 이 학당은 완전히 중국인 손으로 넘어갔다. 지난해부터 외국인 교수와 직원이 단 한 명도 없다.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유도 설명했다. “중국 곳곳에 교회학교를 세운 선교사들 잘못이 크다. 군림하며 가르치려고만 했다. 상대가 무지한 백성이 아닌, 자존심 강하고 우수한 청년들이라는 것을 몰랐다.”

기막힌 훈수도 빠뜨리지 않았다. “중국에서 이익 볼 생각은 버려라. 중국의 전통과 문화에 경의를 표하고 록펠러재단이 설립한 의학원과 병원이 빠른 시간 내에 중국인의 손으로 운영되기를 희망한다고 해야 중국인들에게 영원히 존경받을 수 있다.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을 본받아라.” 맞는 말이었다. 1601년, 베이징에 첫발을 디딘 마테오 리치를 필두로 예수회 선교사들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이 머리에 꽉 차 있었다. 중국인들은 선비 복장한 예수회 신부들을 서양에서 온 유학자라며 존경했다.

록펠러재단의 운영자 록펠러 주니어는 존스톤의 충고를 명심했다. 중국 지원이 이익을 위한 투자가 아닌 자선사업임을, 196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견지했다. 중국의 의학과 농업,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연구, 평민교육과 향촌(鄕村) 건설에 거금을 투입하고 미국의 중국학 연구에도 불멸의 업적을 남겼지만 중국에서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록펠러 주니어, 중국학 발전에 기여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닉슨 대통령 중국 방문에 동행한 뉴욕주 지사 넬슨 록펠러에게 조부와 부친의 중국 지원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1972년 2월 말, 중난하이. [사진 김명호]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닉슨 대통령 중국 방문에 동행한 뉴욕주 지사 넬슨 록펠러에게 조부와 부친의 중국 지원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1972년 2월 말, 중난하이. [사진 김명호]

1949년 10월, 중국이 공산화된 후에도 록펠러재단의 협화의원 지원은 그치지 않았다. 6·25전쟁 발발 6개월 후인 1950년 겨울, 한·미연합군 10만 명과 쑹스룬(宋時輪·송시륜)이 이끈 항미원조 지원군 9병단 등 15만 명이 장진호에서 격돌했다.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지만 진정한 승자는 전쟁을 질타한 한반도의 혹한이었다.

장진호 전투 종결 직후, 협화의원 원장 리쭝언(李宗恩·이종은)이 뉴욕의 록펠러재단에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협화의원이 정부에 귀속됐다.” 록펠러재단은 신중국의 결정을 존중했다. 30년 이상 해오던 지원을 멈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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