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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탕스 지원, 노르망디 상륙 작전 성공 도운 ‘여전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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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호 24면

[세계를 흔든 스파이] 2차 대전 전설 버지니아 홀

홀이 2차대전이 끝난 45년 9월 ‘중앙정보국(CIA)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도너번 장군으로부터 수훈십자장을 받는 모습. [사진 CIA 홈페이지]

홀이 2차대전이 끝난 45년 9월 ‘중앙정보국(CIA)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도너번 장군으로부터 수훈십자장을 받는 모습. [사진 CIA 홈페이지]

스파이라고 하면 흔히 남성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는 편견이다. 전쟁터에서 위험한 작전을 펼치면서 맹활약한 여성 스파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점령지인 프랑스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정보수집과 파괴 공작, 그리고 현지 레지스탕스 조직 임무를 수행한 미국인 버지니아 홀(1906~1982)이 대표적이다.

오발 사고로 왼발 잃은 미국인 #프랑스군 앰뷸런스 기사로 참전 #영 비밀요원 만나 공작원 활동 #연합군 포로 탈옥 등 임무 수행 #나치 “가장 위험한 스파이” 수배 #감시 뚫고 ‘드라군 작전’도 성공

홀은 41년 영국군 비밀정보기관인 특수작전부(SOE) 소속으로 나치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활약하다 살아서 돌아온 전설의 스파이다. 44년 미국 전략사무국(OSS·중앙정보국(CIA) 전신) 소속으로 다시 프랑스에 파견됐다.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연합군의 남프랑스 진입을 위한 드라군 작전을 각각 앞두고 정보수집·후방교란, 현지 레지스탕스 조직과 활성화 임무를 수행했다. 영국으로부터는 대영제국 훈장(MBE)을, 미국에서는 수훈십자장(미군에서 명예훈장 다음으로 높은 훈장)을 각각 수훈했다.

이런 험한 임무를 수행한 홀은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출신으로 외교관을 꿈꾸던 지식인이었다. 래드클리프 컬리지(99년 하버드대 래드클리프 고등연구소로 통합)와 바너드 컬리지(컬럼비아대와 협력 관계인 리버럴 아츠 여자대학)에서 프랑스어·이탈리아어·독일어를 전공했다. 조지워싱턴대에선 프랑스어·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런 뒤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하며 언어와 유럽 생활을 익혔다. 그 뒤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31~39년 폴란드·이탈리아·에스토니아의 미국대사관 영사과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33년 사냥을 하다 오발로 왼발을 잃고 의족을 하고 다녀야 했다.

39년 8년의 영사과 근무를 바탕으로 국무부에 외교관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국무부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그를 떨어뜨렸다. 능력과 자질이 아닌, 여성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한 셈이다. 홀은 부당한 조치에 영사과 직원도 그만두고 유럽에 머물렀다.

홀은 40년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프랑스군 앰뷸런스 기사를 자원해 참전했다. 프랑스가 패전하고 독일에 점령되자 스페인으로 피신했다가 현지에서 만난 영국 비밀요원을 통해 41년 영국 비밀기관인 특수작전부(SOE) 공작원이 됐다. 홀의 외국어 능력과 현지 경험, 그리고 용기를 높이 산 SOE는 그에게 점령지 침투 임무를 맡겼다.

버지니아 홀이 비밀공작을 수행하던 당시와 귀국 뒤 사용한 신분증들.[사진 CIA 홈페이지]

버지니아 홀이 비밀공작을 수행하던 당시와 귀국 뒤 사용한 신분증들.[사진 CIA 홈페이지]

그는 나치 점령지인 리옹에서 성매매 업소 근무자와 이들의 성병을 치료해주던 의사와 친분을 유지하면서 이들이 독일군에게 입수한 정보를 간접 수집해 영국에 보고했다. 건물 다락에 무전기를 설치하고 암호로 본국에 전보를 송신했다. 적지에 추락한 연합군 조종사들을 스페인을 통해 귀환시키는 어려운 임무도 수행했다. 독일군에 잡혀 임시 구금소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12명의 연합군 포로를 탈옥시켜 스페인으로 보내기도 했다.

홀은 자신을 거의 노출하지 않았다. 나치 보안 당국인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와 압베어(해외방첩부)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의족을 하고 다리를 저는 여성이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치는 그를 ‘가장 위험한 스파이’로 부르며 수배했다.

당시 그에게 협력하던 신부의 배신으로 성매매 업소 근무자의 상당수가 그 뒤 체포돼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전후 극히 일부만 살아남아 홀과 재회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은 작전이었다. 배신한 신부는 전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프랑스 당국에 의해 처형됐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귀환도 역경의 연속이었다. 의족으로 프랑스 서남부 국경인 피레네 산맥을 걸어서 넘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스페인을 거쳐 43년 7월 런던으로 귀환했다. 영국은 그에게 대영제국 훈장(MBE)을 수여했지만, 위험하다는 이유로 더는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44년 3월 OSS 공작원을 맡아 프랑스에 다시 침투했다. 레지스탕스에 무기를 공급하고 훈련을 시키는 군사 임무를 맡았다. 의족 때문에 공수 낙하가 힘들자 고속정을 타고 프랑스 해안에 상륙해 레지스탕스와 접선했다.  그렇게 프랑스에 잠입한 홀은 현지 레지스탕스와 함께 독일군에 대항해 파괴 공작과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 암호명 ‘오버로드 작전’ 또는 ‘넵튠 작전’으로 불린 44년 6월 6일의 노르망디 상륙에 앞선 정지 작업이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독일군의 전력 분산을 위해 제2 전선을 만드는 작전에 들어갔다. 44년 8월 15일 20만 명의 연합군 병력을 남프랑스에 상륙시키는 드라군 작전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홀은 새롭게 남부 프랑스로 잠입해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접선해야 했다.

홀은 거기에서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남부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은 젊은 외국인 여성인 홀의 지시나 충고를 사사건건 무시했다. 이들은 툭하면 과거 계급과 경력을 앞세워 홀을 무시했다. 홀은 이들을 설득하고, 때로 압박하면서 작전을 수행했다. 결국 홀은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드라군 작전에서 역할을 한 수많은 연합군 전사의 한 사람으로 족적을 남겼다.

젠더·장애 편견 딛고 임무 수행, 여성 요원 유리천장 깨트려

적지에서 목숨을 걸고 정보를 수집하고, 처절한 공작을 벌이는 스파이는 오랫동안 남성 이미지와 연결됐다. 스파이를 다룬 문학이나 영화 작품에서 주인공은 오랫동안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대중문화에서 스파이 시리즈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007시리즈’는 암호명 007로 불리는 남성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동안 여성은 그를 유혹 또는 지원하는 보조적이거나 종속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폭력적인 전쟁이나 분쟁이 남자들이 벌이는 일탈 행위라서 그렇다는 주장도 있다.

버지니아 홀이 활약하던 시대는 그렇게 거칠었다. 미국 국무부가 여성 외교관을 거부할 당시 홀이 머물던 유럽에는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독일이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고, 뒤이어 참전한 소련과 함께 이를 분할해 서쪽 절반을 점령했다.

유럽에서 2차대전은 그렇게 발발했다. 당시 폴란드와 ‘적이 침략하면 자동 개입한다’는 조항이 들어있는 동맹조약을 맺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만 하고 방관했다. 군사적으론 개입하지 않았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에서 의자에 앉아 경비를 서는 프랑스군 병사의 사진이 당시를 상징했다. 서방에선 이를 ‘가짜전쟁(Phony)’으로, 독일에선 ‘앉아있는 전쟁(Sitzkrieg)’으로 각각 불렀다.

가짜전쟁은 40년 5월 10일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진짜 혈전으로 돌변했다. 프랑스는 견고한 요새들로 이뤄진 국경 방어선인 마지노선을 믿었지만, 독일군은 기갑부대를 앞세워 이를 우회했다. 참전한 영국군은 독일군에 밀려 5월 24일부터 6월 4일까지 됭케르크에서 자국과 프랑스·네덜란드 등의 소속인 33만8000명의 병력을 크고 작은 배에 태워 철수시켰다. 파리는 6월 14일 함락됐고, 22일엔 1차대전의 영웅인 필리프 페탱(1856~1951) 원수가 독일에 항복하고 남부 일부만 통치하는 비시 정권을 수립했다. 프랑스와 연합군엔 비극이고 치욕이었다. 그런 암울한 시대에 연합군 스파이로 활약하며 나치와 싸운 홀에겐 맞설 상대가 더 있었다. 여성과 외국인, 그리고 장애인에게 차별적인 프랑스 레지스탕스, 그리고 연합군 지도부와 끊임없이 부딪히면서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인고의 세월이었다.

홀은 전쟁이 끝난 뒤인 47년 OSS가 CIA로 바뀌면서 비로소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다. CIA가 최초로 고용한 여성 요원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그 전까지는 목숨을 걸고 전진에 투입되고 작전을 펼쳤음에도 ‘임시직’이었던 셈이다.

그는 공작 중에 만난  OSS·CIA 요원 출신의 미국인과 결혼했다. 66년 정년퇴직해 남편과 농장에서 여생을 보내다 82년 세상을 떠났다.

홀은 2차대전이라는 인류의 위기 상황에서 용감하게 싸워 여성 요원의 유리천장을 깨뜨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CIA의 보안 규정을 준수하느라 회고록을 남기지 않은 게 안타까울 뿐이다. 2016년 CIA는 현장 요원 훈련소를 ‘버지니아 홀 원정 센터’로 명명했다. 스파이 조직이 위대한 족적을 남긴 요원에게 바치는 소리 없는 찬사다. 젠더와 장애를 넘어 충성과 헌신으로 음지에서 한 시대를 이끈 애국자를 추모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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